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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28
등록일 2022.12.24 조회수 742

세상(世上)의 시간(時間)은 가파르게 흘렀다. 최고(最高) 권력자(權力者)의 국정(國政) 농단(隴斷)과 그 권력(權力)의 추()함을 불태우는 촛불이 수백만의 꽃송이로 피어났다. 권력(權力)은 촛불 아래 그림자처럼 흔들렸고 마침내 꺼졌다. 권력(權力)이 희망(希望)이 되길 기도(祈禱)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권력(權力)이 흙탕물에 핀 연꽃이길 바랐다. 권력(權力)의 시간(時間)은 화려(華麗)했지만 꽃 한 송이 피워내질 못했고, 숲길의 시간(時間)은 소리없이 흐르면서도 꽃 한 송이 제때에 피워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둘레길 스물두 개의 구간(區間)은 각각(各各)의 사연(事緣)을 안고 흐르는 하나의 길이었다. 지리산(智異山) 고리봉에 떨어진 빗방울 하나가 남원(南原)의 람천이 되고, 람천은 함양(咸陽)에서 엄천강(嚴川江)을 이루어 흐르다가 산청(山淸)에서 경호강(鏡湖江)이 되어 낙동강(洛東江)으로 간다.

 

마찬가지로 그리움은 남원 400살 먹은 노루목 당산(堂山) 소나무에서 하동(河東) 대축마을 600살 문암송으로 흐르고, 선비(先非)의 자존심(自尊心)은 산청(山淸)의 남명(南冥) 조식(曹植) 선생에게서 구례(求禮)의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으로 이어졌다.

 

오래된 땅에서 사람들은 밤꽃처럼 순박(淳朴)했지만 역사(歷史)는 잔혹(殘酷)했다. 람천의 바위는 왜구(倭寇)가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고, 달뜨기 능선(稜線)으로 숨어들었던 빨치산들은 지리산(智異山)의 흙이 되었다. 관군(官軍)에 쫓긴 동학(東學)의 이름없는 목숨은 산청(山淸)의 중태마을 골짜기에서 부릅뜬 눈으로 죽고 이념(理念)이 삶을 지배(支配)하던 시대(時代)에 산동(山東)의 열아홉 살 소녀 백부전은 오빠를 대신(代身)해서 처형장(處刑場)으로 걸어갔다.

 

순박(淳朴) : 순수하고 꾸밈이 없음

 

넘어야 할 삶의 무게 같던 수많은 치()와 재의 고개들과 그 고갯길을 함께 넘어주던 바람은 어디쯤 지나고 있으며, 대축마을 민박(民泊)집에서 창문(窓門)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홀로 막걸리잔을 기울이던 시간(時間)은 또 어디쯤 흘러가고 있을 텐가.

 

목숨 : 살아가는 원동력, 숨을 쉬는 힘

목숨을 도모하다. : 죽을 지경에서 살 길을 찾다.

 

도모(圖謀) : 어떤 일을 이루려고 수단과 방법을 꾀함

 

길은 계절(季節)에 상관(相關)없이 적막(寂寞)했고 적막(寂寞)해서 깊었다. 적막(寂寞)하고 깊은 길에서 목숨들은 주어진 역할(役割)에 충실(充實)했다. 숲길에서 만나는 시간(時間)은 엄정(嚴正)하여 경외(敬畏)로웠고 길손도 한 마리의 숨탄것에 불과(不過)했다.

 

그 길에서 퍼즐 조각(彫刻)을 맞추듯 생각의 편린(片鱗)들을 이어가며 숲길의 적막(寂寞)에 닿고자 했다. 적막(寂寞)에 닿은 내 영혼(靈魂)이 맑은 날 빨래 마르듯 말라 자유(自由)롭게 날리길 바랐다. 더러 유치(幼稚)하여 비리고 까칠하여 떫은 성정(性情)이 가을 햇살에 빛나는 홍시(紅柹)처럼 순치(馴致)되길 희망(希望)했다. 늙은 서어나무와 개오동나무만큼은 아닐지라도 지친 새 한 마리 가슴팍에 깃든다면 더 바랄 게 없는 숲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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