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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무엇이든 쓰게 된다. by 김중혁-14
등록일 2023.01.03 조회수 988

()은 사람을 구분(區分)하는 것, 서로 다른 가치관(價値觀)을 떼어놓은 것의 상징(象徵)이다. ()은 우리를 지켜주면서 또 타인(他人)을 배제(排除)한다. ()은 결국(結局) 다른 논리(論理)를 받아들이지 않는 고정(固定)된 시스템이다. 세계(世界)는 거대한 벽()이고 우리는 벽()에 던져지는 달걀들이다. () 사이에 끼어있는 달걀들이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달걀들이다.

 

손으로 쓴 글씨는 친근(親近)해 보이지만 타자기(打字機)로 쓴 글씨는 어딘지 모르게 엄숙(嚴肅)해 보인다. 컴퓨터로 쓴 글은 프린트한 글과 느낌이 다르다. 타자기(打字機)로 쓴 글에는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때려 박아 손가락의 노고(勞苦)가 그대로 스며있다. 타자기(打字機)는 키보드를 두드리지 않을 때면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오래되어 낡고 시대에 뒤처진 고물(古物) 기억(記憶)으로부터 빠르게 사라져 가는 시대(時代)의 유물(遺物)인 이 타자기(打字機)는 내게서 떠난 적이 없다. 함께 지낸 지난날을 돌이켜 보는 동안에도 이놈은 지금 내 앞에 앉아서 오래되고 귀에 익은 음악(音樂)을 토닥토닥 내보낸다. 창문(窓門) 밖의 아침은 따갑고 푸르고 아름답다. 지금 타자기(打字機)는 주방(廚房) 식탁(食卓) 위에 있고 내 손은 그 타자기(打字機)에 놓여 있다. 한 글자 한 글자씩 나는 그 타자기(打字機)가 이런저런 단어(單語)들을 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치 타자기(打字機)가 살아있는 생명체(生命體)인 것처럼 묘사(描寫)된 글이다. 자신(自身)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타자기(打字機)가 쓰는 것을 지켜보는 것처럼 묘사(描寫)한다. 타자기(打字機)의 구조(構造)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가지런히 정렬(整列)된 키보드는 동물(動物)의 이빨 같고 문자(文字)를 품고 있는 글쇠들은 출격(出擊)을 기다리고 있는 박쥐 군단(群團) 같다. 키보드에 손을 얹고 있으면 강렬(强烈)한 긴장감(緊張感)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요즘은 거의 타자기(打字機)를 쓰지 않는다. 타자기(打字機)가 역사(歷史)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결정적(決定的)인 이유(理由)는 지나치게 존재감(存在感)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타자기(打字機)는 인쇄소(印刷所) 앞에서 글을 쓰는 것 같은 기분(氣分)이 든다, 자신(自身)의 글이 책()으로 출판(出版)될 수 있음을 시각적(視覺的)으로 볼 수 있다. 타자기(打字機)를 쓰기 위해서는 그 압박감(壓迫感)을 견뎌야 한다.

 

글을 쓸 때 지금은 어디에나 CCTV가 있기 때문에 목격자(目擊者)가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힘들다. 어디에나 휴대전화(携帶電話)가 있으므로 소식(消息)을 뒤늦게 전달(傳達)할 방법(方法)이 없다. 세익스피어가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現在)에 떨어진다면 모든 이야기가 엉망진창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휴대전화(携帶電話)에 장착(裝着)GPS를 통해 적()들의 위치(位置를 쉽게 알아낼 수 있으므로 소설(小說)의 부피를 단축(短縮)시킬 수 있다. 단순(單純)한 착각(錯覺)이나 오해(誤解) 때문에 두 사람의 운명(運命)이 영원(永遠)히 엇갈릴 확률(確率)도 거의 없다. 편지(便紙)처럼 한 사람이 긴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반대편(反對偏)에 있는 사람이 그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다음 자신(自身)의 이야기를 시작(始作)하는 대화(對話)가 이제 불가능(不可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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