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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무엇이든 쓰게 된다. by 김중혁-17
등록일 2023.01.03 조회수 907

말은 글보다 자주 오해(誤解)를 불러일으킨다. 글은 문장(文章)과 문장(文章) 사이의 세세(細細)한 논리(論理)가 내용(內容)을 뒷받침해주기 때문에 오해(誤解)의 소지(素志)가 적다. 말은 굵직한 이유(理由)와 논리(論理)만 부각(浮刻)된다. 사람들은 듣는 말을 자기(自己)의 머리로 재구성(再構成)하고, 각자(各自)가 다르게 해석(解釋)한다. 말은 흘러가 버리면 오해(誤解)가 풀리지 않는다. 글과는 다른 점이다.

 

대화(對話)만 하고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문제(問題). 대화(對話)에는 치밀(緻密)하고 자세(仔細)한 논리(論理)가 없다. 즉흥적(卽興的)이다. 논리적(論理的)인 것 같은 말도 받아 적어놓고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다. 오직 글만이 언어(言語)의 세세(細細)한 논리(論理)를 표현(表現)할 수 있다. 문장(文章)을 쓰는 사람은 자신(自身)의 언어(言語)를 정확(正確)하게 전달(傳達)하기 위해 수십 번 수백 번 고친다. ()만 읽고 대화(對話)를 하지 않는 것 역시 문제(問題). ()에는 반론(反論)이 없고 피드백이 없다. ()을 무조건(無條件) 신뢰(信賴)하면 벽()에 갇힌다. 언어(言語)나 비언어(非言語) 사이, 말과 글 사이에 인간(人間)들이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작업(作業)하지 않고 오직 나 자신(自身)을 위해 창작(創作)한다는 말은 오해(誤解)의 소지(素志)가 많다. 대중성(大衆性)을 고려(考慮)하지 않는다는 말도 되고 소통(疏通)에는 관심(關心)이 없다는 말로도 들릴 수 있다. 혼자만을 위한 작품활동(作品活動)이라면 왜 전시(展示)를 하고 출판(出版)을 하고 공연(公演)을 하는가?

 

글을 쓰다 보면 독자(讀者)를 상상(想像)하면서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빠져서 쓰는 경우가 많다. 독자(讀者)가 아닌 작가(作家) 자신(自身)을 설득(說得)하기에도 바쁘다. 누굴 신경(神經) 쓰고 챙기고 염두(念頭)해 둘 여유(餘裕)가 없다. 어떤 대상(對象)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창작(創作)의 과정(過程)에서는 뭔가를 얻기 위해 집중(集中)하고 집중(集中)한다. 어찌 창작(創作)의 과정(過程)뿐이겠는가. 목표(目標)를 설정(設定)하고 혼신(渾身)을 다해 도전(挑戰)하는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오직 내적(內的)인 완결성(完結性)만이 중요(重要)하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중요(重要)하지 않다.

 

화가(畵家) 베프한시스베이커는 그림을 그릴 때 사용(使用)하기 위해 먼지를 모았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작업실(作業室) 청소(淸掃)를 하지 않았다. ()을 채취(採取)하듯이 조심스럽게 회색(灰色)의 먼지를 수집(收集)하는 그를 떠올린다. 먼지를 배양(培養)한 그다.

 

그림을 그린 그 순간에는 그림을 사는 사람이나 자기(自己) 그림을 평가(評價)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쓸 때도 종이 위에 쓴 글이 실제(實際)처럼 느껴지는 순간(瞬間) 현실(現實)을 잊고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사람들은 자신(自身)이 어떻게 보이는지 또는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가진다.

 

글이든 음악(音樂)이든 그림이든 모든 작품(作品)을 내 생각에 맞춰주기를 바랄 때는 작가(作家)가 하려고 했던 무언가를 놓치고 말 것이다. 작품(作品)을 대하는 사람들은 각자(各自)의 마음대로 해석(解釋)할 권리(權利)가 있고 작가(作家)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작가(作家)가 나의 생각에 맞춰주기를 기대(期待)하는 순간(瞬間) 그 작품(作品)은 바람 빠진 공처럼 생명(生命)을 잃게 될 것이다. 각자(各自)의 길을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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