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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책 읽기) 회색사랑(저자 윤창식)-1
등록일 2022.12.16 조회수 810

회색(灰色) 사랑

저자 윤창식

 

<1> 물레방아 도는데

까두산 요새(要塞) 전투(戰鬪)에서 살아남은 따이한 병사(兵士)들의 얼굴은 치열(熾烈)했던 전투(戰鬪)의 야릇한 흥분(興奮)과 남쪽나라의 열기(熱氣)로 뒤범벅이 된 채 야전(野戰) 막사(幕舍)로 돌아왔다. 청룡(靑龍)부대 5연대 3대대(大隊) 11중대(中隊) 말단(末端) 소총수(小銃手) 송창현 상병(上兵)은 그제야 끈이 반쯤 풀린 군화(軍靴) 속에서 무언가 걸리적거리는 것을 감지(感知)했다. 군화(軍靴) 속을 헤집어 창현의 손에 들려나온 것은 전북(全北) 진안(鎭安)이 고향(故鄕)인 김복규 일병(一兵)의 군번(軍番)줄이었다. 피아간(彼我間)에 총알이 빗발치고 포성(砲聲)이 자욱한 까두산 요새(要塞)의 험준(險峻)한 정글을 1미터 간격(間隔)을 두고 포복(匍匐)으로 기어오르는 11중대원(中臺院)들이 하나둘씩 쓰러진다.

 

"김 일병 김 일병! 야 새끼야, 김복규! 쫌 일어나라!"

 

송 상병(上兵)이 악을 쓴다. 김 일병(一兵)은 핏물이 흘러나오는 입가에 온전히 발성(發聲)되지 못한 몇 마디 음절(音節)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 그때 분대장(分隊長) 오명진 중사(中士)의 다급한 목소리가 정글 속을 울린다.

 

"야 임마 뭐하나? 송 상병(上兵)! 김일병(一兵) 군번줄 빨리 수습(收拾)!“

 

살아남은 병사(兵士)들은 형언(形言)키 어려운 별의별 표정(表情)을 지으며 막사(幕舍) 근처(近處)에서 전리품(戰利品)을 정리(整理)하고 아군(我軍)의 전상자(戰傷者)를 처리(處理)하느라 부산했다. 창현은 유독(惟獨) 자기(自己)를 따르던 김복규 일병(一兵)의 질긴 목숨을 지탱(支撑)한 군번(軍番)줄을 전사자(戰死者) 처리(處理) 조장(組長) 박태원 하사(下士)한테 넘기며 한바탕 굵은 눈물을 쏟았다.

 

벌써 남국(南國)의 정글에는 밤이 내리고 있었다. 군데군데 터진 막사(幕舍)의 천장(天障) 사이사이로 나트랑 항구(港口)의 밤하늘 별빛들이 꿈결인 듯 가물거리고, 열대(熱帶)의 습윤(濕潤)한 바람을 타고 막사(幕舍) 주변(周邊)의 자리공 이파리들이 무슨 유령(幽靈)인 듯 흔들거렸다. 검게 익은 자리공 열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强烈)한 내음이 창현의 폐부(肺腑)로 파고들었다. 자리공의 검붉은 열매는 따이한 병사(兵士)들의 총구를 떠난 총알에 까만 전투복(戰鬪服)을 붉게 물들이며 죽어가던 베트콩들의 눈동자처럼 음산(陰散)했다.

 

송창현은 중학교(中學校) 2학년 5월 말에 일주일(一週日)간 농번기(農繁期) 방학(放學)을 맞았으나 자기 집 논밭이라곤 오징어 귀때기만도 못해서 논밭에 나가 부모(父母)를 도울만한 일도 딱히 없어 그저 빈둥대다가 바로 이웃한 연포마을 물레방앗간에나 놀러 갈까 궁리(窮理)를 했다.

 

창현이 아홉 살에야 초등학교(國民學校)를 들어가는 바람에 여태까지 같은 학년(學年)이 된, 한 살 아래 강정옥을 불러낼 참이었던 것이다. 너럭 바위산에서 흘러내리는 냇물로 돌아가는 물레방아 옆으로 겨우 달아낸 초가집이 하나 있었고 그곳이 바로 정옥이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집이었다. 창현은 휘파람을 불며 그날따라 별나게 까불거리면서도 혹 동네 친구들과 부딪힐까 봐 슬슬 눈치를 살피며 옆 마을로 향했다. 유독(惟獨) 붉은 황토(黃土)흙이 몸을 있는 대로 드러낸 언덕배기에 이르자 아카시아꽃 향기(香氣)가 코에 스멀거렸다. 창현은 중학교(中學校) 입학(入學) 후 삼거리 만물상회(萬物商會)에서 처음 맛보았던 롯데 아카시아 껌이 불현듯 생각나 침을 꿀꺽 삼켰다.

 

스멀거리다 : 살갗에벌레따위가기어가는것처럼근질근질하다

 

황토(黃土) 언덕을 막 넘어서자 왼편짝으로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이 눈에 들어왔다. 늦봄의 따사로운 바람을 타고 보리밭이 금물결로 일렁거렸고 그때마다 마음은 마냥 설레었다. 예상대로였다. 보리밭 가에 심겨진 뽕나무에는 까만 오돌개가 가시내 젖멍울처럼 여물고 있었다. 창현은 아주 어릴 적부터 유난히 오돌개를 좋아했던 터라 잠시 물레방앗간 정옥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돌개를 따먹느라 정신(精神)이 없었다. 창현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나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였다. 보리밭 너머 너럭바위 산 위로 검은 적란운(積亂雲) 구름 떼가 곤두서며 몰려오는가 싶더니 금세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현은 소나기를 피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늦봄에 내리는 비는 약비라서 비를 맞으면 키도 크고 몸매도 멋지게 자란다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터였다. 오돌개 물이 배기도 했으려니와 꽤나 세차게 퍼붓는 소나기 때문인지 입술이 퍼렇게 되어갔으나 가슴 두근거림은 한결 잦아드는 듯했다. 창현이 후줄근하게 젖은 채 두 마을 사이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냇물을 막 건너려는 찰나 무슨 희끗한 물체(物體)가 냇물에 떠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쩌것이 뭐시까?"

 

두 쪽으로 연결된 동그란 하얀 물체가 돌다리를 감돌아 아래쪽으로 떠내려가려는 순간, 창현은 이끼 낀 돌을 잘못 밟아 삐끗 미끄러지면서 물속으로 첨벙 엎어져 하얀 뭉치에 코를 박고 말았다. 만져보면 그것은 아래 삼거리 정미소 옆 전방(廛房)에서 파는 동그란 찐빵처럼 부드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설핏 스쳐갔다. 창현은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누가 볼세라 거동(擧動)을 재빨리 수습(收拾)하려 했으나 아까 보리밭에서처럼 또 한 번 가슴이 요동(搖動)쳤다.

 

설핏 : 생각이나 모습 따위가 잠깐 나타나거나 떠오르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창현이 고개를 들어 물레방앗간을 바라보자 조금씩 멈추어가는 빗줄기 속에서 비누 냄새가 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빗물에 흠뻑 젖은 정옥이가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냇가에 서서 창현을 쏘아보고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도 몽땅 젖어 있었다. 정옥은 저수지 아래로 흐르는 작은 계곡(溪谷)에서 빨래를 하다가 뜻하지 않게 소나기를 만난 모양(模樣)이다.

 

"너 손에 든 거 이리 내놔!"

"...?"

"얼릉 안 내놔?"

"?"

"니 손에 들고 있는 것 말이여!"

 

정옥은 창현이가 망연(茫然)히 서 있는 냇물 속으로 성큼 내려와서는 창현의 손에서 하얗고 보드란 뭉치를 낚아채더니 획하고 몸을 돌려 물레방앗간 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전쟁(戰爭)터라고 맨날 전쟁(戰爭)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멀리서 이따금씩 들려오는 포성(砲聲) 속에서도 새가 날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까두산 요새(遼塞) 전투(戰鬪) () 한동안 전쟁(戰爭)은 소강(小康)상태로 접어들었다. 병사(兵士)들은 저마다 빛바랜 사진(寫眞)을 꺼내 보거나 편지(便紙)를 쓰면서 귀국(歸國) 날짜를 꼽아보는 측도 있었다. 송창현 상병(上兵)은 윗주머니에서 중학생(中學生) 세일러복을 입은 정옥의 사진(寫眞)을 꺼내 보았다. 창현은 중학교 2학년 늦은 봄날 소나기에 젖은 정옥의 가슴을 떠올리며 또 한 번 전율(戰慄)했다. 가시내도 참!

 

전율(戰慄) : 두려움으로 인하여 몸이 벌벌 떨림

 

교문(校門) 입구(入口)'이루어서 전진하자'라는 교훈(校訓)이 바윗돌에 새겨진 성진중학교의 스물대여섯 명 남짓 3학년 학생들은 너무나 빨리 와버린 졸업(卒業)을 숙명(宿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졸업식(卒業式) 날 늙수그레한 교장(校長)의 환송식(歡送式) 말씀은 자못 비장감(悲壯感)마저 들었고 콧날을 시큰거리게 했다.

 

"사랑하는 졸업생(卒業生) 여러분! 졸업(卒業)은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始作)입니다. 제군(諸君)들 앞날에 부디 영광(榮光)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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