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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책 읽기) 회색사랑(저자 윤창식)-2
등록일 2022.12.16 조회수 830

영광(榮光)이고 뭐고 학교(學校)를 벗어난 열일곱 살 풋내기 청춘(靑春)들은 대부분 갈 곳이 딱히 없었다. 그래도 운() 좋게 고등학교(高等學校)에 진학(進學)하게 된 몇은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온몸에 받았다.

 

'맬젓장시 딸년'이라고 놀림을 받던 윤혜경은 엄마가 오일장(五日場)에서 억척스럽게 멸치젓을 팔아 번 돈으로 읍내 성요셉여고에 들어가게 되었고, 농지개량(農地改良) 조합장(組合長) 아들 박용배는 강진농고에 입학(入學)하는 행운(幸運)을 얻었다. 혜경이야 공부를 그런대로 잘하는 편이었고 심성(心性)도 고와서 머슴애들이 틈만 나면 맬젓장시 딸이라고 놀려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배시시 웃을 뿐이어서 성요셉여고에 들어간 것을 두고 너나 할 것 없이 참 잘된 일이라고 칭송(稱頌)했다. 하지만 용배 녀석이 농고(農高)에 진학(進學)한 것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았다. 공부는 둘째치고라도 돈을 좀 만지고 나름 위세(威勢)가 있는 자기 아버지만 믿고 날뛰는 폼이 농업학교(農業學校)와는 영 안 어울리는 일이었고 그것도 등록(登錄)을 포기(抛棄)한 학생의 빈자리를 메우는 보결(補缺) 입학(入學)이라는 소문(所聞)이 자자(藉藉)했던 것이다.

 

삼거리 정미소(精米所)를 지나자 월출산(月出山)을 넘어온 북서(北西) 계절풍(季節風)이 한바탕 불어오는가 싶더니 이내 가느다란 눈발들이 갈 길을 잃은 듯 형편없이 나부낀다. '정처(定處)없다.'는 말이 갓 졸업(卒業)을 맞이한 어린 청춘(靑春)들에게 문득 체감(體感)되기 시작한 때문이었을까.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연 친구(親舊)가 없었다. 평소 그토록 풋풋하고 명랑(明朗)하기 짝이 없던 정옥이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낡은 트럭이 저 멀리 산비탈을 넘어 소실점(消失點)으로 사라지자 신작로(新作路)에는 채 연소(燃燒)되지 못한 기름 냄새가 스멀거리고, 말없이 걸어가는 청춘(靑春)들의 헤진 운동화(運動靴) 밑에서 올라오는 자갈돌 부딪히는 소리만이 침묵(沈默)의 시공(時空) 속으로 파고들곤 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은 쪽은 성질(性質) 급한 창현이었다. 답답한 가슴을 달랠 길 없다는 안타까움이 좌심방(左心房)을 옥죄어오자 창현은 매우 도발적(挑發的)인 제안(提案)을 했다.

 

"야 느그들아, 우리 술 한 번 마셔볼까? 내가 사올텡께야."

"저기 모퉁이 정씨 제각(祭閣)에서 쪼끔만 기다리고 있어라잉.“

 

창현은 친구들을 제각(祭閣)에 잠시 머물도록 당부(當付)해놓고는 센배이과자 등속(等屬)을 파는 가게에 들렀다. 가게 안에는 토종(土種)닭 염통처럼 생긴 5촉짜리 전구(電球)가 조는 듯 희미한 불빛을 던지고 있었다. 본래(本來)는 그저 탁주(濁酒)라도 한 병() 사올 요량(料量)이었으나 창현은 먼지가 택택 끼어있는 진열대(陳列臺) 위에서 붉은 유혹(誘惑)의 빛깔을 기어코 훔쳐보고야 말았다. 그것은 전혀 예상(豫想)치도 못한 일이었다. 다시 한달음에 제각(祭閣)으로 달려간 창현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에게 살짝 배신감(背信感)이 들기도 했으나 그게 무슨 대수이랴 싶게 친구들 앞에 붉디붉은 두홉들이 술병을 내밀었다.

 

"이것이 뭔 술인지 아냐?

"요것은 포도(捕盜) 껍질로 맹근 포도주(葡萄酒)여 알간?"

"포도주(葡萄酒)라고?" 유장식이 미간(眉間)을 약간 찌푸리며 되묻는다.

그래 임마! 쩌그 프랑스 사람들은 밥 묵기 전에 한 잔씩 하기도 하고 애인(愛人)끼리 키... 아니 크큭."

"아니, 뭔 말을 하다가 말어?"

 

정옥은 언제 그랬냐는 투로 예()의 명랑성(明朗性)을 되찾으며 눈을 반짝였다. 윤혜경은 좀 눈치를 챈 듯 얼굴이 붉어졌다.

 

짜식! 너는 워디서 요상한 것을 잘도 주워 오더라잉?" 투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하대성이 웬일로 정색(正色)을 한다.

"아래뜸 사는 경태 형()이 보여준 아리랑 잡지(雜誌)에서 봤다니까. 히히."

대체 뭣을 봤다는 거냐?"

"남자 여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춤을 추다가 포도주(葡萄酒)를 마시면서 뽀뽀도 한다더라!"

"미친놈들 아녀!" 장식이가 퉁명스럽게 받는다.

 

아래뜸 : 아래쪽 마을

 

송창현은 사십(四十)이 가까올 무렵에 막내 이모(姨母)가 살고있는 경기도(京畿道) 성남시(城南市) 은행동에 차린 코딱지만 한 다도해(多島海) 슈퍼에서 일과(日課)를 마치고 홀로 지하(地下)방에 지친 몸을 뉘였으나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는다. '내가 중학교(中學校) 졸업식(卒業式) 날 미치지만 않았어도... 역시 물레방앗간은 위험해 흐흐..

 

창현은 다시 1층 가게로 올라온다. 창현은 몇 달 동안 팔리지도 않는 채 진열대(陳列臺) 구석에 놓여있는 싸구려 국산(國産) 포도주병(葡萄酒甁)을 쓰다듬어 보다가 흠칫 놀란다. 몸이 뜨거워져 왔기 때문이다. 창현은 다음 주 일요일(日曜日)부터 그리 멀지 않은 은혜(恩惠) 교회(敎會)에 나가기로 마음먹은 터라 늘 마음일랑 정갈해야 한다는 믿음 아닌 믿음으로 몇일 째 술을 멀리하고 있었으나 마지막 제()라도 올리는 심정(心情)으로 포도주병(葡萄酒甁) 마개를 따서 몇 모금의 술을 목으로 넘겼다. 달착지근한 맛은 여전했다. 그러자 정옥의 얼굴이 떠오르며 해병대(海兵隊) 전입(轉入) 동기(同期) 고웅석 이등병의 절절(切切)한 기도(祈禱) 소리가 환청(幻聽)처럼 울린다. "오늘 하나님의 보혈(寶血)로 아픔과 죄()()함을 씻었으니 송창현 이등병(二等兵) 마음속에 평강(平康)이 충만(充滿)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祈禱)드리옵나이다. 샬롬!"

 

창현은 중학(中學) 졸업(卒業) 후 얼마 안 되어 강진(康津) 남포(南浦)에서 외갓집 사촌형(四寸兄)을 도와 짱뚱어잡이로 3년간 꼬박 모은 돈을 아랫마을 하대성의 꼬임에 빠져 몽땅 날려 먹고 충동적(衝動的)으로 해병대(海兵隊)를 지원(志願)했던 게 아닌가. 창현은 녹색(綠色)의 별 모양(模樣)을 한 해병대(海兵隊) 모자(帽子)와 빨간 명찰(名札)을 달고 꿈에도 그리던 첫 휴가(休暇)를 나왔다.

 

고향(故鄕) 삼거리 정류장(停留場)에서 버스를 내린 송창현 이등병(二等兵)은 무서울 것이 없었으나 정옥이를 만나려면 여전히 용기(勇氣)가 필요했다. 포도주(葡萄酒)는 그에게는 무슨 죄업(罪業)의 탑()을 당당하게 쌓아올리는 역설적(逆說的)인 도구(道具)라도 되는 것일까. 4년 전 중학교(中學校) 졸업식(卒業式) 날 들렀던 가게의 주인아줌마는 고개를 떨구고 졸고 있다가 창현의 군화(軍靴)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입가를 훔치며 고개를 든다.

 

"필승(必勝)! 안녕(安寧)하십니까! 무엇에 쓰려고 팔리지도 않는 포도주(葡萄酒)는 꼭 갖다 놓습니까?"

"지랄하고 있네. 내 마음이여 워쩔겨?"

"아니어라, 괜히 해본 소리고요. 어쩌면 요로코롬 내 마음을 잘 아실까잉.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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