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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책 읽기) 회색사랑(저자 윤창식)-3
등록일 2022.12.16 조회수 790

초가을 햇볕이 내리쬐는 들길을 따라 창현의 가슴에 안긴 포도주병(葡萄酒甁)의 볼록한 부위(部位)가 점점 따스해지기 시작했다. 창현이 군대(軍隊)에 간 사이에 동네마다 전기(電氣)가 들어와 정옥네 물방앗간으로 곡식(穀食)을 찧으러 오는 발길이 끊겼다고 한다. 마을 유지(有志)가 전기(電氣) 모터를 설치(設置)하여 번듯한 정미소(精米所)를 차렸다는 소식(消息)은 정옥의 편지(便紙)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창현은 상여(喪輿)집이 훤히 보이는 언덕을 막 넘어서자 그리운 물방앗간이 보였다.

 

'아니, 아직도 물방아는 돌아가고 있는디?

 

창현은 불쑥 의아(疑訝)한 생각이 밀려왔으나 전기(電氣)로 돌아가는 정미소(精米所)가 생겼다고 한들 너럭바위산 아래 계곡(溪谷) 물길은 쉬지 않고 흘러내려 물방아를 돌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안도(安堵)했다.

 

정옥은 싸리나무로 얽어 만든 사립문을 살며시 잡은 채 미소(微笑)를 머금고 새카만 송창현 이등병(二等兵)을 향해 탐진강(耽津江)의 반짝이는 윤슬처럼 손을 흔들었다.

 

윤슬 : 달빛이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보고 싶었다 정옥아!”

 

창현은 정옥의 손을 덥석 잡았으나 정옥은 예의 명랑성(明朗性)은 커녕 우울한 낯빛이 역력했다.

 

역력(歷歷)하다 : 훤히 알 수 있게 분명하고 또렷하다

 

나 내일 모레 떠나....”

"워디로?"

"목포로."

"뭣할라고?"

"아부지가 많이 아프셔."

느그 아부지를 목포 콜롬방 병원에 모시고 가려고?”

 

정옥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나 목포 삼학 봉제(縫製) 공장(工場)에 취직(就職)했어. 내일 모레 떠나.....

"그랬구나. 어쩌냐."

"뭐가 어쩐다는거여?"

"아니, 그냥."

"그냥이 뭐여. 너답지 않게. 귀신(鬼神) 잡는 해병(海兵)이 뭐 그런대?“

 

정옥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 순간 창현은 정옥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서슬에 그때까지 창현의 가슴에 안겨있던 포도주병(葡萄酒甁)이 땅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면서 검붉은 액체(液體)가 핏물처럼 스무 살 청춘(靑春)들의 발목을 흥건히 적셨다.

 

서슬 : 언행 따위가 독이 올라 날카로운 기세

 

"오메 이것이 뭐당가?"

 

그때서야 정옥은 창현의 가슴팍을 밀쳐내며 소스라친다.

 

"괜찬여!"

 

창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정옥의 콧볼을 비틀며 달랬다.

 

"나 내일 모레 떠나.”

"오늘 세 번씩이나 떠나냐? 벌써 목포(木浦) 용댕이 부둣가에 도착(到着)하고도 남겄다야."

"떠나는 날 못 볼지도 모릉께 이거나 받아줘."

"뭐신디?"

"꼭 휴가(休暇) 마치고 귀대(歸隊)해서 풀어봐. 내가 미나리밭에서 번 돈으로 산 선물(膳物)이여.“”

 

꿈만 같은 67일의 휴가(休暇)를 마치고 송창현은 귀대(歸隊) 길에 올랐다. 창현은 정옥이 목포(木浦)로 떠나는 날 삼거리 정류장(停留場)까지 따라갈 참이었으나 그러지 말라고 한사코 말리는 정옥을 향해 물레방아가 바라보이는 황토(黃土) 언덕배기에서 손을 흔들었다. 정옥은 배추흰나비처럼 하얀 손수건을 흔들었다. , 하얀 손수건!

 

귀대(歸隊)해서 내무반(內務班)에서 몰래 선물(膳物)을 풀어보라는 정옥의 신신당부(申申當付)에도 더 이상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귀대(歸隊) 버스 맨 뒷자리로 가서 자그마한 선물(膳物)꾸러미를 풀어보았다. 상자(箱子) 안에는 수저통만한 크기의 물건(物件)이 하얀 손수건에 감싸여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얀 손수건에는 보라색 자수(刺繡)실로 "인내(忍耐)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라는 문구(文句)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손수건을 마저 벗겨내자 분홍색(粉紅色) 편지지(片紙紙)와 함께 알몸이 드러났다. 만년필(萬年筆)이었다.

 

창현씨에게!

씨라고 불러보니 쑥스럽네요

부디 몸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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