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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책 읽기) 회색사랑(저자 윤창식)-10
등록일 2022.12.16 조회수 663

혜경은 창현의 자전거(自轉車)를 타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싫다는 뜻인지 애매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착하기로 소문난 혜경이지만 예기(豫期)치 못한 상황(狀況)에 적잖이 당황(唐慌)하는 눈빛이 역력(歷歷)했다.

 

"그래. 너는 버스 타고 오니라. 나 먼저 갈게.“

 

창현이 자전거(自轉車) 페달을 막 밟으려는 순간(瞬間) 혜경이 소리친다.

"나 태워줘.

 

자전거(自轉車)는 두 어린 청춘(靑春)을 싣고 좁다란 시골길을 달린다. 초가을 저녁 바람이 자전거(自轉車) 바퀴살을 감돌면서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길바닥에 깔린 자갈 때문인지 자전거 뒷좌석은 더욱 덜컹거리는 것 같았다. 혜경은 솔치(松峴)마을 고갯길에서 몸이 앞으로 쏠리자 창현의 등에 달라붙은 갯벌 흙이 잔뜩 묻은 옷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벌써 혜경의 하얀 교복 상의에도 뻘흙이 튀기고 있었다.

 

"무섭냐?" 괜히 신이 나는지 창현은 큰 소리로 묻는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순해 빠진 혜경이가 성요셉학교의 수녀(修女) 선생님을 닮아가나 싶게 조신(操身)하게 대답(對答)한다.

 

"너 광주 장식이한테서 편지 안 왔디?"

"왔었어. 근디 학교(學校)로 오는 바람에..“

 

짜식, 지가 광주무등고에 다닌다고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제잉."

 

자전거(自轉車)가 마지막으로 속력(速力)을 내며 좁다란 길로 이어진 진등 마을로 들어서자 더욱 흔들거리는 혜경은 창현의 허리를 껴안듯 했고 하얀 교복(校服)은 거의 뻘흙으로 젖어갔다. 스치며 스며들고 서성이며 흘러가고 흔들린다는 것은 생명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정옥의 아버지 강진구는 광주 동명동에 있는 형제(兄弟)고아원(孤兒院)에서 19세 만기(滿期) 가 되어 함께 나온 친구(親舊)를 따라 강진(康津)으로 내려와 친구(親舊)네 고모(姑母)집의 농사(農事)일을 잠시(暫時) 거들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연포 물레방앗간 일꾼으로 들어가게 된다. 마침 물방앗간 주인(主人) 남자(男子)가 집을 나간 지 석 달째 소식(消息)이 없고 주인(主人) 여자(女子) 혼자 방앗간 일을 도맡아 하기엔 힘이 부쳤던 것이다. 물방앗간은 오일장(五日場) 못지않게 성시(盛市)를 이루었고 밑도 끝도 없는 자잘한 소문(所聞)들이 아낙네들의 입을 타고 퍼지기도 하였다.

 

"진구 총각은 수암 마을 황득수의 총각 때 얼굴이랑 허우대가 똑같다니

."

 

고추방아를 찧으러 온 아주머니는 정색(正色)을 하고 혀를 끌끌 찬다.

 

"득수네가 아들 하나 잃어버린 이야기야 물아래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있간디!"

 

또 한 아주머니가 확신(確信)에 차서 말을 잇는다. 진구는 그러한 수군 거림은 별로 귀에 와 닿지 않았고 그저 물방앗간 쇠절구공이가 곡식(穀食)을 빻는 소리만이 가슴을 텅텅 울릴 뿐이었다. 이제야 얼굴도 모르는 친부모(親父母)를 만난들 별다른 감흥(感興)이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너럭바위산 위에 달이 뜬 날 물방앗간은 매우 위험(危險)한 공간(空間)이었을까. 진구는 방앗간 옆으로 달아낸 허름한 방에 누웠으나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처그적 처그적 물방아 돌아가는 소리만이 밤의 적막(寂寞)을 수놓고 있었다.

 

그날 밤 달만 뜨지 않았어도...’

 

착한 심성(心性)을 가진 진구는 몇날 며칠을 두고 달밤을 원망(怨望)했고 말수가 몰라보게 줄어들었다. 방앗간 주인아주머니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진구와 주인아주머니는 물방아꾼들의 별것 아닌 쑥덕거림에도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방앗간 주인아주머니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신혼(新婚) 때부터 남편(男便)이라는 작자(作者)는 틈만 나면 가출(家出)을 일삼았고 교도소(矯導所)를 들락거린다는 소문(所聞)만이 저수지(貯水池)에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정옥이 물방앗간에서 태어난 것은 근처 바람결에 들려오더니 급기야 사기도박과 살인미수 혐의로 경찰에 쫓기다 호사꾼들에게는 입에 딱 맞는 입방아거리였으나 꼭 나쁜 의미로만 회자(膾炙)되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잘 되었제. 남편이라고 웬수 같었으니 월매나 속이 곯아졌겠어!

ᄍᄍ"

"암은. 이제라도 진구와 잘 살면 오죽 좋겠어.“

 

하지만 물방앗간의 꿈만 같은 행복은 정옥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불현듯 깨지고 말았다. 정옥이 엄마의 죽음이 예기치 않게 찾아왔던 것이다.

 

베트남 중부(中部)지역(地域) 짜빈동에는 며칠 째 퍼붓던 폭우(暴雨)가 멈추더니 찌는 듯한 더위가 몰려왔다. 짜빈동은 남베트남에 속했으나 시도 때도 없이 베트콩이 출몰(出沒)하였고 국군(國軍)에게 호의(好意)를 베푸는 척하는 일부 마을 남자(男子) 중에는 베트콩과 내통(內通)하며 짜빈동 마을로 우물물을 길으러 오는 따이한 병사(兵士)들에게 위협적인 부비트랩을 몰래 설치(設置)하는 등 매우 위태로운 지대였다. 하지만 마을 모습은 한반도(韓半島)의 여느 농촌(農村)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병사(兵士)들은 이곳에 오는 날이면 더욱 더 향수(鄕愁)에 젖곤 했다. 송창현 상병(上兵)은 늘 황덕균 일병(一兵)과 한 조()가 되어 짜빈동으로 식수(食水) 당번(當番)을 나간다. ()소리와 포탄(砲彈) 소리가 잠시 잦아든 짜빈동의 불안(不安)한 정막 속에 아열대(亞熱帶)의 들꽃들은 무람없이 피어나고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가 꿈결인 듯 들려왔다. 마침 우물로 이어진 비스듬한 논밭에서는 월남(越南) 처녀(處女) 꽁까이들이 삿갓 모자를 쓰고 김을 매고 있었다. 황 일병(一兵)이 부산항(釜山港)을 떠나 베트남으로 향하는 병사(兵士) 수송선(輸送船)에서 주워들은 서 툰 월남(越南) 말로 꽁까이들을 향해 죽이지 않을 테니 이리 나오라며 농을 건다.

 

무람없다 : 조심스럽지 못하고 예의를 지키지 않아 버릇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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