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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책 읽기) 회색사랑(저자 윤창식)-12
등록일 2022.12.16 조회수 686

하지만 그보다도 아무리 마을 동창(同窓) 친구(親舊)라지만 새파란 총각의 자전거 뒤에 아가씨가 아무렇지 않게 타고 간다는 것이 무척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벌써 3년 동안이나 서울에서 살다 온 장식이지만 순해 빠지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판이라서 사실 혜경이와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날은 장식은 버스로 가겠다는 혜경이 쪽으로 자전거(自轉車) 페달을 밟아 가까이 다가갔다.

 

"중학교(中學校) 졸업(卒業)한 이후(以後)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오늘이 첨이네."

"..., 그런가?"

"타라. 신작로까지만 함께 타고 가고 들길은 둘이 내려서 걸어가면 되잖 어."

", 그럴까?"

 

혜경은 마지못해 말을 끌면서 6년 전에 탐진강(耽津江) 어귀에서 짱뚱어잡이를 하던 창현이 얼굴이 생각났다. 그해 9월 중순쯤이던가. 코스모스가 흐드러진 성요셉여고 교문(校門) 앞 하교(下校) 길에서 온몸이 뻘흙으로 범벅이 된 창현을 마주쳤고 창현의 자전거(自轉車) 뒤에 앉아 집으로 가던 중 새하얀 상의(上衣) 교복(校服)이 온통 더럽혀진 날이 선명(鮮明)히 떠올랐던 것이다. 혜경은 시간이 꽤 지났지만, 그날 한없이 미안(未安)해하던 창현의 얼굴표정(表情)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장식과 혜경, 두 청춘(靑春) 남녀(男女)를 싣고 페달에 경쾌한 쇳소리를 내며 속도(速度)를 알맞게 올리는 자전거(自轉車)는 무슨 영문인지 좀 의아(疑訝)해 하는 듯했다.

 

"우체국(郵遞局) 일은 할만해?"

"힘든 건 없어. 방위(防衛)보다야 몇 배는 낫지."

"아니, 귀신(鬼神) 잡는 방위(防衛)를 물로 본 것 아녀?"

"방위(防衛)가 어뜩케 귀신(鬼神)을 잡어? 귀신(鬼神) 잡기는커녕 불쌍하게 기합(氣合)도 받더만. 다 봤당께."

 

혜경이 연거푸 세 문장(文章)을 이어서 말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혜경의 기합(氣合) 어쩌고 하는 말은 사실(事實)이었다. 며칠 전 경찰서(警察署) 소속(所屬) 방위병(防衛兵)이 연대 본부(本部) 전통문 미수취 사건(事件)으로 면사무소(面事務所) 방위(防衛)까지 경찰지서(警察支署) 뒤뜰에서 단체(團體) 기합(氣合)을 받았던 것이다. 하필 혜경이 그 장면(場面)을 우체국(郵遞局) 창문(窓門)으로 보았던 모양(模樣)이다.

 

땀에 젖은 장식의 자전거(自轉車)는 삼거리 정미소(精米所)를 왼편으로 감돌면서 큰 돌멩이를 잘못 밟았는지 꽤 심하게 흔들렸고 혜경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방위복 허리께를 꽉 붙잡았다.

 

"허리 살은 꼬집지 말고 옷만 잡어라잉." 이 말에 혜경은 웃음을 터뜨릴 듯 얼굴을 붉히며 장식의 등짝을 찰싹 때리는 것이었다. 기분이 한껏 고양된 장식은, 하지만 이내 진지해지며 정옥의 안부(安否)를 물었다.

 

"정옥이와는 연락하고 지내냐? 뭔 카수를 한다고 하던디? 좀 안 좋은 소식(消息)도 들리는 것 같고?"

 

"왜 말이 없어? 젤로 친한 친구(親舊)잖여."

"나중에 차분히 이야기해 줄게. 대신(代身)에 창현이 소식은 들어?"

"아니. 월남(越南) 파병(派兵) 직후(直後) 군사우편(軍事郵便) 한 번 받고는. 그때도 잘 있다고 하면서도 전체적(全體的)인 내용(內容)이 어두운 어감(語感)으로 이어져 있더군. 시적(詩的)인 표현(表現)도 보이고, 본래(本來) 글을 잘 쓰는 친구(親舊)지만, 귀국(歸國)해서 제대(除隊)할 날짜도 많이 지났으나 고향(故鄕)에도 돌아오지 않고."

"전투(戰鬪)에서 부상(負傷)을 당했다는 소문(所聞)도 들리고."

"그래? 그나저나 정옥이는 창현이를 사랑하긴 한 거냐?"

 

혜경은 좋아한다는 말 대신 장식이가 발화(發話)한 사랑이라는 낱말에 몸을 한번 움찔하였다. 천사표 아가씨! 사랑의 색깔은 무슨 색?

 

강진구는 연포 마을 정미소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환갑(還甲)을 훨씬 넘은 나이도 나이려니와 농경지(農耕地) 정리(整理)사업(事業)으로 연포 냇물도 흐르는 물길이 달라져 멎어버린 물방아 틀을 철거(撤去)하던 중 이끼가 잔뜩 낀 물고랑에서 넘어져 허리를 크게 다쳤던 것이다. 그래도 매달 서울에서 딸내미가 부쳐주는 돈으로 약()값을 대가며 홀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암 마을에 산다는 늙은 웬 노인(老人)이 진구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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