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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책 읽기) 회색사랑(저자 윤창식)-13
등록일 2022.12.16 조회수 672

"자네는 날 모르꺼시네만 나는 자네 어릴 적 모습이 어렴풋이 생각나누

."

"뉘신디 저를?"

"내가 자네 숙부(叔父)라네. 자네 부친(父親) 성함(姓銜)은 황득수씨이고."

"고것이 뭔 말씀이다요? 지가 황가라고라?”

"그런당께. 장수 황가여."

"참말로 뭔 속인지 모르겠네요."

"그러꺼시네. 자네 다섯 살 적에 광주 대인시장에서 자네를 잃어버리고

낙담(落膽)하시던 성님 내외(內外)는 평생(平生) 죄스럽게 사시다가....“

 

강진구의 뇌리(腦裏)에는 형제(兄弟)고아원(孤兒院) 시절(時節)과 읍내(邑內) 청수당 한약방(韓藥房)의 마약(痲藥) 심부름꾼으로 생고생하던 때가 어제인 듯 스쳐간다.

 

'내가 강진구가 아니라 황진구라고?' 진구는 60여년 평생(平生)을 돌아보면 하는 일마다 허탈(虛脫)하기 짝이 없는 인생길에 강이면 어떻고 황이면 무슨 대수이랴 싶었다. 진구는 아픈 허리를 이끌고 퇴락(頹落)한 물방앗간을 돌아보며 회한(悔恨)에 잠기곤 한다. 뒤뜰에는 그해 오월(五月)에도 정옥이가 그토록 좋아하던 보라색 난초꽃은 어김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정옥의 빛나는 일터 서울 관악구 신림동 사거리 1번지스탠드바는 술꾼과 춤꾼들로 늘 불야성(不夜城)을 이루었다. 순전히 강난초의 인기(人氣) 덕분(德分)이었다. 강난초는 큰 키로 알맞게 살이 오른 계란형 얼굴에 화장기(化粧氣)가 없어도 눈에 띠는 미모(美貌)가 단연 돋보이는 변두리 무명(無名) 가수(歌手)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강난초는 왠지 노래 음정(音程)이 잘 잡히지 않고 목소리 음량(音量)도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이 들던 날, 일을 겨우 마치자 구역질이 넘어와 견딜 수 없었다. 손님들로부터 받아 마신 술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다음 날도 매스꺼움이 여전(如前)했으며 나날이 자꾸 몸이 부어오는 느낌이었다. 정옥은 창현이 월남(越南)으로 떠나기 며칠 전날 밤 목포(木浦) 대반동(大盤洞) 종점(終點)의 저녁 바다에 내리던 붉은 낙조(落照)를 뒤로 하고 어둠이 깔리던 죽교동 골목을 지나 함께 자취방으로 돌아왔던 회색빛 밤이 꿈길인 듯 가물거린다. 그게 정말 사랑이었을까?

 

창현은 야간(夜間)점호(點呼)를 끝내고 취침(就寢)에 들면서 심호흡(深呼吸)을 한 번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날 밤 바로 고향(故鄕)집으로 돌아왔어야 했어... 창현에게는 물레방앗간보다 위태(危殆)로운 곳은 혼자 사는 처녀(處女)의 자취방(自炊房)이라는 사실(事實)이 새삼 뼈아팠다.

 

베트남 중부(中部)의 작은 마을 짜빈동은 북베트남으로 이어지는 요충지(要衝地)였다. 그 마을로부터 4Km 정도 떨어진 정글 외곽(外郭)에 진지(陣地)를 구축(構築)하고 있는 청룡(靑龍) 부대(部隊) 3중대(中隊)는 간헐적(間歇的)으로 벌어지는 베트콩과의 전투(戰鬪)에서 의외(意外)로 적지 않은 전상자(戰傷者)들이 발생(發生)했으나 전쟁(戰爭)터에서 살고 죽는 일은 병사(兵士)들에겐 무감각(無感覺)의 일상(日常)화라는 슬프고 비극적(悲劇的)인 인지(認知)부조화(不調和)가 심화(深化)되어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포화(砲火) 속에서도 새가 날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니 전쟁(戰爭)통에도 사랑이, 남녀(男女) 간의 사랑이 가당(可當)한 일일까? 짜빈동 마을로 물을 길러 가거나 현지(現地) 농산물(農産物)을 받으러 가는 병사(兵士)들 중에는 월남(越南) 처녀 꽁까이와 눈이 맞기도 하였고 살가운 성격(性格)을 지닌 송창현 상병(上兵)을 유독(惟獨) 따르는 꽁까이들이 많았다. 그중 나트랑 항구(港口)의 바닷물처럼 검푸른 눈동자의 응웬티린이라는 꽁까이는 송 상병(上兵)의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타국(他國)의 전쟁(戰爭)터에서 맺은 낯선 사랑은 무슨 색깔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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