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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책 읽기) 회색사랑(저자 윤창식)-17
등록일 2022.12.16 조회수 698

11중대(中隊)의 역습(逆襲)은 매우 성공(成功)한 듯 했으나 임동현 병장(兵長)은 매복(埋伏)해 있던 적()이 참호(塹壕) 속으로 진입(進入)하자 수류탄(手榴彈)을 터트려 적()과 함께 산화(散華)하였고, 황덕균 일병(一兵)은 여러 발의 총탄(銃彈)으로 치명상(致命傷)을 입자 자신(自身)의 무기(武器)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기관총(機關銃)의 총열을 뽑아 풀숲에 멀리 던져버린 후 숨을 거두었다.

 

함께 우물물을 길으러 가곤 했던 황 일병(一兵)의 시신(屍身)을 수습(收拾)할 겨를도 없이 송창현은 악다구니를 쓰며 짜빈동 언덕을 기어오르다 그만 풀썩 쓰러졌다. 어깨에 관통상(貫通傷)을 입은 것이다. 손에 쥔 M16 소총(小銃)이 맥없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한쪽팔도 떨어져나갔다. 피피피.

 

하늘을 떠받치는 동네 봉천동에도 피피피가 낭자(狼藉)했다. 정옥은 남자(男子)아이를 낳았다. 천적(天敵)에게 잡히면 발 하나쯤 쉽게 떼어버리고 도망치는 메뚜기처럼 창현이 20여 년 동안 달고 다니던 팔 하나가 떨어져나간 순간 열 달 동안 정옥의 몸속에 담겨있던 핏덩이가 쏙 빠졌단 말인가. 피할 수 없는 피의 순간(瞬間)들이 아픈 역사(歷史)가 되려 하는가.

 

강진구는 퇴락한 물레방앗간 뒤뜰을 둘러보며 회한(悔恨)에 젖는다.

 

"그날 밤 달만 뜨지 않았어도....“

 

정옥이 무척이나 좋아하던 보라색 난초(蘭草)꽃이 모두 져버린 지 5개월째로 접어들었으나 정옥의 소식을 알 길이 없다. 매달 아버지 약값 조로 부쳐오는 얼마 되지 않은 우체국(郵遞局) 전신환(電信換)도 끊긴 지 벌써 오래되었다. 강진구는 몇 날 며칠을 몽당거리다가 어느 토요일(土曜日) 오후(午後) 옆 마을에 사는 혜경네로 힘든 발걸음을 내디뎠다.

 

"혜경이 집에 있으까?"

"...?"

"나 정옥이 애비여.“

 

샘가에서 막 머리를 감고 돌아서던 혜경은 몰라보게 늙어버린 정옥의 아버지를 보자 저으기 놀라는 것이었다.

 

"혜경아, 정옥이 애비여."

"그려요. 엄니 아부지는 읍내(邑內) 오일장(五日場)에 가시고 안 계시는디."

아녀. 혜경이를 쪼깐 만나러 왔구먼.”

"저를요?“

 

진구는 툇마루에 천근 같은 몸을 겨우 부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혜경이는 정옥이 소식(消息)을 대충이라도 알 것 같어서."

"아니어라. 나도 정옥이 소식(消息)을 통 몰라 깝깝해 하고 있었어라."

"정옥이가 카수를 하는 곳이 서울 워디라던디? 맞어! 신림동 사거리라던 가? 밤에만 스탠드불이 켜지는 무슨 요상한 곳이란 소리도 있고? 내가 이 몸으로 그곳을 찾아갈 수도 없고잉.“

 

진구는 삼거리를 중심(中心)으로 물아래 동네마다 떠도는 정옥에 대한 소문(所聞)들 을 겨우 짜맞춰가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나도 거기까지만 알고 있어라. 가시내가 서울 막 올라가서는 편지(便紙)도 자주해서 잘 있다고, 쪼끔만 고생(苦生)하면 자기 노래 레코드판이 나온다고 좋아했어라.“

 

두 사람의 대화(對話)는 중심(中心)을 잡지 못하고 겉돌기도 하려니와 몇 개월 째 소식(消息)이 없는 정옥의 행방(行方)은 혜경도 알 수 없는 노릇이라서 금방(今方)이라도 쓰러질 듯 힘겨워하는 진구의 얼굴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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