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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책 읽기) 회색사랑(저자 윤창식)-19
등록일 2022.12.16 조회수 666

퇴근(退勤) 무렵 성진 우체국(郵遞局)으로 걸려온 전화(電話)를 받은 윤혜경은 흐느끼기만 하는 강정옥의 울음에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氣分)이었다.

 

"가시내야 울지만 말고 뭔 일인지 말이나 해야!"

"으흐윽 흐으윽, 나 으흐윽.... 나 애기 낳았어야. 흐흐윽윽윽.

"가시내야 고것이 뭔 소리다야. 곧 카수가 된다드니 뭔 애기를 낳았다고

?"

"혜경아. 꼭 너만 알어야 쓴다잉. 자세(仔細)한 것은 만나서 이야기하자. 어쨌든 니가 쫌 도와줘야 쓰겄다야."

 

 

<4> 비에 젖은 터미널

유장식은 대학 4학년 말, 외무고시(外務考試) 공부(工夫)를 접고 한국(韓國) 외환은행(外換銀行)에 취업(就業)했다. 같은 외()자 돌림 직업(職業)을 얻었으니 잘된 일이라 스스로 위안(慰安)을 삼았다. 하지만 장식은 매일 세계(世界) 여러 나라의 유가증권(有價證券)과 지폐(紙幣)를 만지며 겨우 한 달을 버티다 도무지 그 일은 더 이상 못할 일 같아서 하루라도 빨리 그곳을 탈출(脫出)하고 싶었다.

 

터미널은 만남보다 떠남이 어울리는 공간(空間)이던가. 장식은 비 오는 날 저녁, 은행(銀行) 업무(業務)를 마치고 홀로 가끔 찾던 터미널 간이(簡易) 주점(酒店)에서 밖을 내다보며 상념(想念)에 잠긴다. 어디서 흘러와 어디로 가는 발길들인가. 그들의 행색(行色)이 남루(襤褸)하면 할수록 혹은 화려(華麗)하면 할수록 지워지지 않는 마음속 상처(傷處)들은 끝내 실루엣으로 내비치는 것 같았다. 풀잎에도 상처(傷處)가 있다고 했던가. 어느 생명(生命)치고 찢기어 살()되지 못한 내상(內傷)으로 커오지 않은 것 있으랴. 사람들은 끝없이 어떤 도정(道程)에 있다. 어디를 찾아가는 것이다. 비록 부존(不存)의 곳일지라도. 그래, 터미널이 정말 종착역(終着驛)이 맞던가? 세상 것 어느 하나 끝이란 게 있을까? '마지막'이라고 말하면 마음 한쪽 그 끝 간 데에서 알 수 없는 애잔함이 물밀어 오르는 듯했다. 걸어온 길 뒤돌아보아 못다한 회한(悔恨)이 서리기 때문일까. 맞아, 그런 게 아니었어, 내가 너무 한 게 아니었을까. 장식은 늘 회한(悔恨)에 젖는다. 세상이 팍팍하면 할수록 실재(實在)하지 않아도 좋다. 사평역 톱밥 난로(煖爐)에 차디찬 발을 모으고 싶은 것 아니던가. 그래서 인생(人生)의 터미널에는 아픔을 딛고 일어설 한 줌 모티브가 있어야 한다. 지난 밤늦은 술로 쓰린 속 달래줄 어묵국 한 그릇 같이할 사람이라도 있어 주어야 한다. 인생(人生)이 서부영화(西部映畫)처럼 이기게 된 사람만이 이기는 허망(虛妄)한 것이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안이(安易)했을 것이고, 비에 젖은 터미널은 한낱 턱없는 비효율(非效率)의 집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휴가(休暇) 나온 군인(軍人)이 주간(週刊) 잡지(雜誌) <선데이 서울>을 호주머니에 꽂고 고향(故鄕) 갈 막차를 기다리고, 늙은 어미 참기름병 가슴에 안고 막내 아들놈 집 가는 길 묻고 또 물을 때쯤, 빗물로 흘러내리는 '아직도 못다한 사랑'을 차창(車窓)에 그리며 카세트테이프가 목 놓아 노래하는 곳. 다 왔다고 생각하는 이에겐 더 이상 터미널은 없다. 터미널은 기다려 그리움으로 건너가는 길목이 아닐까?

 

그러던 어느 날 외환계(外換係) 우성한 과장(課長)이 조용히 유장식을 불렀다.

 

"장식씨, 내일 본점(本店)에 출장(出張) 좀 다녀와야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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