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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책 읽기) 회색사랑(저자 윤창식)-22
등록일 2022.12.16 조회수 646

밤이 되어도 가을비는 그치지 않고 두 아가씨의 터미널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5> 난초꽃 필 무렵

외팔이 송창현에게도 어김없이 봄날은 찾아왔다. 다도해(多島海) 슈퍼 건너편 단독주택(單獨住宅) 옥상(屋上) 화분(花盆)에 연분홍(軟粉紅) 앵두꽃이 제법 화사(華奢)한 어느 날 슈퍼 잔일을 마치고 골방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그 치열(熾烈)했던 월남전(越南戰) 짜빈동 전투(戰鬪) 수훈상(受勳賞)과 맞바꾼 한쪽 팔뚝의 혼령(魂靈)은 어디쯤 떠돌고 있을까.

 

그깟 수훈상(受勳賞)을 하나만 더 받았더라면 한쪽 팔마저 떨어져 나갈 뻔했군. 누워서 비스듬히 올려다 본 벽면(壁面)에는 중학생 교복(校服)을 입은 정옥의 어여쁘게 웃는 사진과 베트콩의 아내 응웬티린의 사진(寫眞)이 나란히 붙어 있다. 창현은 쓸쓸히 웃는다. 당시 응웬티린은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몇 마디 서툰 한국말로 따이한 군인(軍人)에게 남편(男便)이 죽었노라고 했다. 그때야 송창현 상병(上兵)은 응웬티린이 꽁까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송 상병(上兵)은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나트랑항의 검푸른 물결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입을 굳게 다문 사진(寫眞) 속 그녀의 얼굴빛은 잿빛이다. 진정한 사랑의 색깔은 무슨 색()일까?

 

창현은 장식과의 약속대로 자투리 시간(時間)을 이용(利用)하여 고등학교(高等學校) 검정고시(檢定考試) 공부(工夫)를 시작(始作)했다. 장식은 주말(週末)을 이용(利用)하여 다도해(多島海) 슈퍼에 들러 창현의 공부(工夫)를 도왔다. 중학교(中學校) 졸업(卒業)하고 담을 쌓았던 공부(工夫)가 창현에게는 생각키보다 훨씬 힘에 겨웠다.

 

"신학대학(神學大學)에 진학(進學)하려고 도전(挑戰)하는 공부(工夫)라서 하느님께서 단번에 붙여 주시겠지.“

 

장식은 때로는 농담(弄談)을 섞어가며 창현을 위로(慰勞)도 하며 공부(工夫)를 다그쳤으나 창현은 친구의 가르침 앞에서 졸기 일쑤였다. 창현은 월남전(越南戰)에서는 죽지 않으려고 베트콩들에게 전의(戰意)를 불태웠으나 이번엔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는 친구(親舊)의 모습에 장식은 가슴 한편쪽이 아려온다.

 

창현은 고교(高校) 졸업(卒業) 검정고시(檢定考試)에 세 번 연거푸 떨어진 후 마침내 합격(合格)하게 되었다. "장식아, 나 합격(合格)해 부렀다! 화랑무공훈장(花郞武功勳章)이 별거더냐 작껏!“

 

터미널은 만남보다 떠남이 어울리는 공간(空間)이던가. 장식은 비 오는 날 저녁, 은행(銀行) 업무(業務)를 마치고 홀로 가끔 찾던 터미널 간이(簡易) 주점(酒店)에서 밖을 내다보며 상념(想念)에 잠긴다. 어디서 흘러와 어디로 가는 발길들인가. 그들의 행색(行色)이 남루(襤褸)하면 할수록 혹은 화려(華麗)하면 할수록 지워지지 않는 마음속 상처(傷處)들은 끝내 실루엣으로 내비치는 것 같았다. 풀잎에도 상처(傷處)가 있다고 했던가. 어느 생명(生命)치고 찢기어 살()되지 못한 내상(內傷)으로 커오지 않은 것 있으랴. 사람들은 끝없이 어떤 도정(道程)에 있다. 어디를 찾아가는 것이다. 비록 부존(不存)의 곳일지라도. 그래, 터미널이 정말 종착역(終着驛)이 맞던가? 세상 것 어느 하나 끝이란 게 있을까? '마지막'이라고 말하면 마음 한쪽 그 끝 간 데에서 알 수 없는 애잔함이 물밀어 오르는 듯했다. 걸어온 길 뒤돌아보아 못다한 회한(悔恨)이 서리기 때문일까. 맞아, 그런 게 아니었어, 내가 너무 한 게 아니었을까. 장식은 늘 회한(悔恨)에 젖는다. 세상이 팍팍하면 할수록 실재(實在)하지 않아도 좋다. 사평역 톱밥 난로(煖爐)에 차디찬 발을 모으고 싶은 것 아니던가. 그래서 인생(人生)의 터미널에는 아픔을 딛고 일어설 한 줌 모티브가 있어야 한다. 지난 밤늦은 술로 쓰린 속 달래줄 어묵국 한 그릇 같이할 사람이라도 있어 주어야 한다. 인생(人生)이 서부영화(西部映畫)처럼 이기게 된 사람만이 이기는 허망(虛妄)한 것이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안이(安易)했을 것이고, 비에 젖은 터미널은 한낱 턱없는 비효율(非效率)의 집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휴가(休暇) 나온 군인(軍人)이 주간(週刊) 잡지(雜誌) <선데이 서울>을 호주머니에 꽂고 고향(故鄕) 갈 막차를 기다리고, 늙은 어미 참기름병 가슴에 안고 막내 아들놈 집 가는 길 묻고 또 물을 때쯤, 빗물로 흘러내리는 '아직도 못다한 사랑'을 차창(車窓)에 그리며 카세트테이프가 목 놓아 노래하는 곳. 다 왔다고 생각하는 이에겐 더 이상 터미널은 없다. 터미널은 기다려 그리움으로 건너가는 길목이 아닐까?

 

그러던 어느 날 외환계(外換係) 우성한 과장(課長)이 조용히 유장식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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