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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책 읽기) 회색사랑(저자 윤창식)-27
등록일 2022.12.16 조회수 600

이처럼 창현과 조욱은 천상(天上)과 천하(天下)의 아스라한 경계(境界)에 서서 또 하나의 불가해(不可解)한 세상(世上)을 향해 서투른 발걸음 내딛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 관악구(冠岳區) 신림동 난곡시장(蘭谷市場) 근처는 서민들의 발걸음이 잦았다. 5월이면 보라색 난초(蘭草)꽃이 흐드러진 계곡(溪谷)은 계곡(溪谷)물이 차방차방 흘러내려 아름답지만 늘 목이 마른 결핍(缺乏)의 지대(地帶)가 아니었던가. 이름하여 난초(蘭草)의 계곡(溪谷), 난곡(蘭谷)! 난곡시장(蘭谷市場) 바로 뒤편 허름한 지하(地下) 건물(建物)에 들어선 2번지스탠드바 무대(舞臺)에 서서 강정옥이 난초(蘭草)라는 예명(藝名)으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고향(故鄕)의 물레방앗간 뒷전에 피어나던 난초(蘭草)꽃보다 몇 배는 처연(悽然)하게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창현을 만난 정옥은 좀처럼 고집(固執)을 꺾으려들지 않았다. 신학대학(神學大學)에 나가는 동안만 슈퍼를 좀 봐달라는 창현의 간곡(懇曲)한 부탁(付託)을 정옥은 냉정(冷靜)하게 뿌리쳤다. 정옥은 정식(正式)으로 자기 노래를 취입(吹入)하지 않고는 물러설 수 없다고 이를 앙다물었다. 세상(世上)에 어쩔 수 없는 일이 이것뿐이더냐. 창현은 군()에서 막 제대(除隊)하여 취직(就職)자리를 알아보던 고향(故鄕) 후배(後輩) 녀석에게 일주일(一週日)에 세 번 신학교(神學校)에 나가는 날만 슈퍼를 대신 맡아주도록 부탁(付託)했다.

 

창현은 조욱의 말마따나 형편없는 싯발 때문인지 그해 연말 몇 군데 신춘문예(新春文藝)에 도전했으나 입질조차 없었다. 조욱이 끝내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의 발라드풍과 트롯이 믹스된 3집 타이틀곡 <내 맘 같지 않네>가 왜 쫄딱 망했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에이 작껏! 우리, 노래하나 만들어볼까?" 송창현은 다음 해 3월 개강일 에 맞춰 장조욱을 일부러 만나서 벼르고 벼르던 제안(提案)을 한 것이다.

 

"뭔 노래를 만들자는 거야?" 조욱은 심드렁했다.

"내가 쓴 가사(歌詞)를 줄텡께 형()이 곡()을 붙이면 되잖여!"

"나 이제 속세(俗世)의 노래와는 담을 쌓았다니깐."

또 속세(俗世) 타령이구만. 담장은 무너지라고 존재(存在)하는 것 아녀?”

짜식, 어디 가사나 이리 내놔봐.”

 

그때 창현은 겟세마네 동산(東山)에 피어나는 보라색 아이리스 꽃잎의 환영(幻影)을 보았다.

 

"야 임마! 이런 유치(幼稚)한 가사(歌詞)에 나의 신성(神聖)한 곡()을 붙이라고?"

 

창현이 건네준 가사(歌詞)를 몇 줄 훑어 내려가던 조욱이 이맛살을 심하다 싶게 찌푸린다.

 

"아니, 뽕짝 가사(歌詞)야 적당(適當)히 통속적(通俗的)이고 유치(幼稚)해야 제맛이 나는 것 아녀?”

 

난초꽃은 물방아 찧는 소리로 피어난다요.

부끄러움도 모르고요.

 

가난한 날에는 그리움도 죄()가 되듯 회색(灰色) 사랑을 진정(眞正)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다만 흑()과 백()이 만나 회색(灰色)이 되는 것만은 피할 수 없는 숙명(宿命)일 터. 창현은 여태까지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죄스러웠다. 그래도 창현의 가슴팍에는 몇 차례 아스라한 사랑의 냄새들이 물들어 있다. 중학(中學) 졸업(卒業) 후 탐진강(耽津江) 뻘밭에서 짱뚱어잡이를 하던 시절(時節), 갯벌 흙이 잔뜩 묻은 몸으로 하얀 교복(校服)을 입은 여고생(女高生) 혜경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스름 무렵과 월남(越南) 파병(派兵) () 봉제공장(縫製工場)에 다니는 정옥이를 만났던 날 목포 대반동(大盤洞) 종점(終點) 앞바다 물빛은 아직도 온통 회색(灰色)으로 채색(彩色)되어 있다. 월남(越南)의 중부전선(中部前線) 나트랑 항구(港口)로 이어지는 짜빈동 마을 언덕은 또 어떠했던가, 베트콩 전사(戰士)의 아내 응웬티린의 검고 깊은 눈동자를 한없이 바라보던 저녁나절은 온통 잿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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