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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책 읽기) 회색사랑(저자 윤창식)-29
등록일 2022.12.16 조회수 660

장조욱의 말대로 가수(歌手)는 노래 실력(實力)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늦깎이 신학대학생(神學大學生)인 두 남자(男子)에 의해 나름 완성도(完成度) 높은 가요(歌謠)가 생겨났지만 정작 음반(音盤) 제작비(製作費)가 문제(問題)였다.

 

코딱지만 한 창현의 슈퍼에서 무슨 이문(利文)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강 정옥이 난곡시장(蘭谷市場) 뒤편 스탠드바에서 노래를 불러주고 받은 돈을 합쳐 봐도 음반(音盤) 제작비(製作費)는 턱없이 모자랐다. 이런 사정(事情)을 전()해들은 장식은 창현과 정옥의 심정(心情)을 누구보다 절절(切切)히 느끼며 꼬박 석 달 치에 해당(該當)하는 시간강사(時間講師) 강의료(講義料)를 내놓았으나 손이 부끄러울 지경(地境)이었다.

 

역시 세상(世上)은 요지경(瑤池鏡)이라서 돈에 울고 사랑에 속는다지만 돈이란 돌고 돌아야 제맛이 아니던가. 그것이 아니라면 돈이라는 글자에 받침 하나 바꾸면 돌이 되어버리는 장난 같은 세상(世上)에 누구를 원망(怨望)하랴. 풋내기 국제정치학자(國際政治學者) 유장식은 한동안 돈타 령이 퉁탕거리는 환청(幻聽)에 시달리며 돈 버는 경제학(經濟學)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을 겁나 후회(後悔)했다.

 

유장식은 목포(木浦) 근교(近郊)에 자리 잡은 대학(大學)에서 강의(講義)를 마치고 중학교(中學校) 동창(同窓) 하대성에게 전화(電話)로 연락(連絡)을 했다. 대성은 강진(康津) 병영면(兵營面)의 명주(名酒) 설송(雪松) 막걸리 주조장(酒糟醬)에서 매일 직접(直接) 시음(試飮)을 하여 막걸리 맛을 가늠하는 부서(部署)의 부장(副長)으로 일하고 있었다. 중학(中學) 졸업(卒業) ()부터 막걸리통 배달꾼으로 잔뼈가 굵은 하대성은 아랫배가 제법 나온 중견(中堅) 기업인(企業人)처럼 얼굴엔 몰라보게 기름기가 흘렀다. 두 친구(親舊)는 실로 몇 십 년 만에 막걸리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장식이 자네가 뭔 일이여? 무지렁이 촌놈 하대성이를 찾아오다니?"

"뭔 일은 무슨. 자네 생각이 문득 나더구먼."

"그나저나 샌님 같기만 하던 자네가 술도 제법 잘 마시네잉!"

"세월(歲月)이 많이 흘렀잖은가. 자네 마누라 안풍덕 여사(女史)님은 잘 계시제?"

"마누라? 내 덕으로 별 시름없이 맨날 묵고 자고 묵고 자고 하더니 몸땡

이만 더 풍덕(豐德)해져 부렀다네. 으하하하."

"몸 안 아프고 건강(健康)한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그려! 까짓것 인생(人生)이 별거던가.”

 

하대성은 인생(人生)을 다 산 것처럼 달관(達觀)의 경지(境地)를 오르는 듯했다. 장식은 대성이가 눈을 지그시 감는 틈을 타 창현이 얘기를 살짝 꺼냈다.

 

"자네도 알다시피 창현이와 정옥은 여태 둘이 따로 산다네."

"맞어. 창현은 월남(越南)에서 팔뚝 하나를 잊어 묵고 와서 고생고생 한다더만. 그러고 정옥은 아직도 카수를 꿈꾸고?"

"돈이 없어서 꿈만 계속 꾸고 있다네."

"정옥이는 이쁜 얼굴에 노래도 징하게 잘 불렀는디잉.“

 

둘의 대화는 아귀가 맞을 듯 말 듯 하여 장식은 무척 안달이 났다. 그쯤 해서 창현이가 짱뚱어잡이로 번 돈을 대성이가 꼬셔갖고 몽땅 날려먹은 사연(事緣)이 대성이의 입에서 고해성사(告解聖事)하듯 튀어나올 법도 했기 때문이다.

 

유장식은 성진중학교 제23회 졸업생(卒業生) 동창회(同窓會)를 주선(周旋)했다. 졸업(卒業)한 지 30년만이었다. 난초(蘭草)꽃이 보랗게 피어난다는 5월 어느 늦봄 저녁이었다. 모임 장소(場所)는 서울 장충동(奬忠洞) 동국대(東國大) 입구(入口) 엠배서더호텔 건너편 할매족발집이었다. () 졸업생(卒業生) 27명 중 절반(折半) 가까이 참석(參席)했다. 꽤 널찍한 족발집 2층 벽면(壁面)에는 '이루어서 전진하자'라는 성진중학교 교훈(校訓)이 적힌 자그마한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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