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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11
등록일 2022.12.18 조회수 808

둘레길은 오른쪽으로 기다랗게 펼쳐진 달뜨기 능선을 허리춤에 끼고 운리(雲里)를 향해 서서히 내려간다. 능선의 품속을 걷다 산모롱이 길턱에 앉으니 숲길은 흑백영화(黑白映畫)의 정지화면(停止畫面)처럼 고요하다. 산이 고요하니 골이 고요하고 골이 고요하니 내 마음도 고요하다. 시선(視線) 멎은 곳에 바람이 멈추고 시간(時間)도 멈춘다.

 

길턱 : 길섶과 비탈면이 이어지는 길바닥의 가장자리

능선마루 : 능선의 마루

능선(稜線) : 산등성이를 따라 죽 이어진 선

 

지리산에 가면 살길이 열린다는 믿음으로 이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어느 계곡(溪谷) 어느 능선(稜線)에서 고요가 되었을까? 지리산의 절()과 멸() 속에 하늘나리가 빨갛게 피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홀로 걷는 휘휘한 숲길은 절()이어서 적()이고, ()이어서 막()이다.

 

휘휘하다 ; 무서운느낌이 들 정도로 고요하고 쓸쓸한

 

호랑이의 포효(咆哮)가 전설(傳說)이 된 숲에서 홀로 우는 뻐꾸기의 울음이 초혼가(招魂歌)가 되어 고요를 깨뜨린다. 그가 타계(他界)한지 17년이 지나서 그에 대한 빛과 그림자를 추억(追憶)의 레테 강물에 흘려보냈는가 했다. 그러나 그를 부르는 초혼가(招魂歌)가 합창(合唱)이 되어 울린다.

 

초혼가(招魂歌) :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는 노래

 

포장(鋪裝)길의 임도(林道)도 홀로 가는 것이 무료(無聊)했는지 가다가 휘고 휘었다가는 다시 내리받이로 달린다. 다시 쉬엄쉬엄 평지(平地)로 늘어지며 장난치듯이 20리를 그렇게 간다. 행선(行禪) 하듯이 걷다 보면 임도는 두 시간쯤 걸려 점촌 마을에 닿는다. 추워도 향기(香氣)를 팔지 않는다는 매화(梅花)는 선비들의 사랑을 받던 귀한 나무였다.

 

무료(無聊) : 지루하고 심심함,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있음

내리받이 : 비탈친 곳의 내려가는 방향(方向)

치받이 : 비탈진 곳의 올라가는 방향(方向)

 

행선(行禪) : 행동하면서 하는 참선, 이곳저곳에서 선을 닦는 일

 

 

용케 길가 감나무에는 갓난아이 조막 같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고, 마음 앞 논에서는 곱게 자란 벼들이 가을날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장마를 피해 한 달 만에 나선 둘레길 시간은 인간의 탐욕(貪慾)과 상관없이 그대로 흐르고 있었다. 내버려둠으로써 주관(主管)하는 시간의 흐름이 경이(驚異)롭다. 산줄기 하나가 병풍(屛風)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운무(雲霧)가 얹혀 능선은 보이지 않았다.

 

조막 : 주먹보다 작은 물건을 비유적으로 표현

주관(主管)하다 : 얻던 일을 책임지고 맡아 관리하다.

 

산마루 : 산등성이의 가장 높은 곳

 

하늘빛은 운무(雲霧)에 가려 산이 하늘로 오르는지 하늘이 산으로 내려오는지 모호하다. 예사롭지 않을 한낮의 폭염(暴炎)을 아침 안개에서 본다. 숲은 여름새와 매미 울음으로 요란하고 길섶의 참나리는 얼굴 가득한 주근깨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좌우 한 쌍의 목장승이 위병(衛兵)처럼 서 있는 쉼터를 만난다. 쉼터는 전망대(展望臺) 역할(役割)도 겸()하며 자연스레 왔던 길을 되돌아보게 한다.

 

산세(山勢)는 급한데 산의 허리를 타고 걷는 길은 동네 뒷산 오솔길처럼 편안(便安)하고 아늑하다. 참나무 그늘 사이사이로 빛기둥이 시원하고 두세 번 만나는 작은 개울과 너덜겅은 운치(韻致)를 더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참나무가 길벗을 대신한다. 혼자서 걷기에 제격이다.

 

운치(韻致) : 고상하고 우아한 멋

운무(雲霧) : 구름과 안개, 눈을 가려 지식이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

 

너덜겅 : 돌이 많이 흩어져 있는 비탈

 

살다가 서러워질 때나 심연(深淵)에 빠진 설움이 아득할 때는 혼자 걸을 일이다. 흐르는 강 하나 가슴에 담고 걷다 보면 홀로 왔다가 홀로 가는 설움을 보게 될 것이다. 장마 뒤끝의 계곡물은 풍요(豐饒)롭고 힘차다.

 

벼슬을 마다하고 처사(處士)의 삶을 살았던 남명(南冥)에게는 천하(天下) 영웅(英雄)의 공()도 대자연의 한 뼘 땅에 불과(不過)했을 것이다. 내세울 한 뼘 땅이 없음이 남명(南冥)의 시()로 변명(辨明)되고 위로(慰勞)가 된다. 가없는 푸른 산 위로 뭉게구름이 흐르고 계곡물은 쏠로 흐르고 소()로 흐른다. 바위를 씻어 흐르는 물꽃에 가슴 속 더께도 흘려보낸다.

 

심연(深淵): 좀처럼 헤어나기 힘든 구렁

처사(處士) :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草野)에 묻혀 살던 선비

() : , 땅이 우묵하여 물이 괴어 있는 곳

: 작은 폭포(瀑布)

물꽃 :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물결을 비유적(比喩的)으로 표현(表現)

더께 : 찌든 물건에 낮은 거친 때, 누적되어 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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