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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15
등록일 2022.12.18 조회수 706

고백(告白)하는데 쌀도 꽃이 피어야 맺힌다는 것을 오늘 알았다. 당연(當然)한 이치(理致)인데도 벼도 꽃이 핀다는 관념(觀念)조차 갖지 못했다. 어느 날 우연치않게 부모님도 신음(呻吟)을 안으로 삼키며 아픔을 참을 때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自覺)하게 되는 것과 같았다. 벼들이 자란 논들은 누르스름하거나 더러는 아직 푸르다. 그때 보았다. 논에는 벼들이 아직 꼿꼿한데 벼마다 하얀 벼꽃이 붙어 있었다. 풀잠자리 알을 닮았다. 벼꽃은 바람이 없어도 스스로 흔들리며 제꽃받이로 나락을 여물게 한다.

 

제꽃받이 = 자가수분(自家受粉)

수분(受粉) : 수술의 화분이 암술머리에 붙는 일

 

흰 쌀의 한톨 한톨은 이처럼 가녀린 꽃이 온몸으로 만들어 낸 기적(奇蹟)들이다. 밥이고 생명(生命)이자 성스러운 신()의 미소(微笑). 여태껏 나를 키운 것은 신()의 미소(微笑)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흔들리는 벼꽃에서 3천 년에 한 번 핀다는 전설(傳說)의 꽃 우담바라를 본다.

 

홀로 가는 고갯길은 쉽지 않다. 산길의 난이도(難易度)는 길을 가다 뒤돌아보는 횟수에 비례(比例)한다. 가는 길에 자꾸만 멈춰서서 뒤를 돌아본다. 산다는 것은 저마다 자기의 짐을 짊어지고 숙명(宿命)처럼 고개를 넘는 것이다. 짊어진 짐을 감당(堪當)할 수 있기만 바란다.

 

고갯길 재빼기에서 반기는 서늘한 바람 한줌이면 두 다리는 다시금 고개를 넘을 수 있도록 힘을 얻을 것이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연신 훔치며 오른다. 지나간 행인(行人)이 합석(合席)하자고 하는데 수저를 끼워 넣을 넉살도 없고 비윗살도 없는 성품(性品)이다. 훈훈한 인심(人心)은 내 누군가에게 이자 붙여 갚아야 할 빚이다. 주산(主山)에서 뻗어 내려온 능선(稜線)의 모양이 지네를 닮았다고 해서 지네재로 불린다.

 

재빼기 : 재의 맨 꼭대기=영마루 잿마루 영두(嶺頭)

연신 : 잇따라, 자꾸

넉살 : 부끄러운 기색없이 비위좋게 구는 짓이나 성미

비윗살 : 비위를 부리는 배짱

 

 

소나무 우거진 숲에 수적(數的)으로 열세(劣勢)인 대나무가 힘겹게 별바라기 하고 있다. 길고 가냘픈 대나무는 작은 바람에도 온몸이 휘청거린다. 뿌리를 잘못 내린 대나무가 안쓰럽다. 맞은바라기 능선들은 발아래로 아득한데 매미 울어 이명(耳鳴)은 그치지 않고 이명(耳鳴)으로 매미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그늘지고 솔가리가 깔려 걷기에 편하다.

 

먼산바라기 : 먼 곳만 우두커니 바라보는 일

개밥바라기 : 서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저녁샛별=장경성(長庚星)=태백성=어둠별

맞은바라기 : 앞으로 바로 보이는 곳 = 맞바라기

이명(耳鳴) : 몸밖에 음원이 없는데도 잡음이 들리는 병적인 상태 =귀울음=귀울림

 

저승꽃 =검버섯=오지(汚池)

오지(汚池) : 물이 더러운 못

오지(奧地) : 대륙 내부의 땅, 두메 산골

 

가파른 계단(階段)은 하늘로 오르고 소나무를 베어 만든 계단목에는 저승꽃처럼 버섯들이 피어났다. 가풀막진 치받이 길이 끝나고 궁항마을 가는 밭둑에는 까마중 열매가 까맣게 익어가고 있다. 종이컵에 담긴 까마중 열매 한 움큼은 오늘 저녁 막걸리 안주가 되어 어린 시절 입맛을 되살릴 것이다.

 

치받이길 : 비탈진 길에서 올라가는 방향(方向)으로 난 길

가풀막 : 몹시 가파르고 비탈지다.

가풀막지다 : 가파르게 비탈져 있는 눈앞이 아찔하고 어지럽다

 


까마중 열매가 입안에서 톡톡 터지며 지난(至難)했던 숲길의 수고를 보상(補償)했다. 궁항마을은 마을 터가 활의 목처럼 휘어졌는데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옴팍지게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이 마을에서 보았던 별들의 향연(饗宴)이 꿈만 같다. 이른 잠에서 깨어나 바라본 오밤중의 별똥 밭에서 뭇별들이 폭죽(爆竹)처럼 터지고 있었다. 별들은 광년(光年)의 거리를 달려와 지리산의 밤하늘에서 한바탕 축제(祝祭)를 벌였었다. 별똥별이 우주선(宇宙船)처럼 날고 은하수(銀河水)에서도 금세라도 우유가 쏟아져 지리산을 적실 듯했다. 총총한 별들의 향연(饗宴)에 숲길도 잠들지 못했고 윤슬은 나뭇잎에서 출렁거렸다.

 

지난(至難)하다 : 지극히 어렵다

: 수효가 매우 많은

뭇별 : =군성(群星), 무리를 이룬 별 =중성(衆星)

윤슬 : 햇빛이나 달빛이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어린 시절 모깃불을 피워놓고 바라보던 밤하늘이 그곳에 있었다. 지금도 눈감으면 별들의 왁자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궁항마을은 가을 단풍(丹楓))가 볼거리라고 하는데 지금은 땡볕이 내리쬐는 8월의 한낮이다. 기다리기에 어둠은 멀고 단풍(丹楓)철은 더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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