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약관 보기
개인정보 보기

책 읽기(독서)

글 정보
제  목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16
등록일 2022.12.18 조회수 797

신라(新羅)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의 영정(影幀)이 봉안(奉安)된 경천묘(敬天廟)에서 왕조(王朝)의 끝자락을 정리(整理)했던 임금의 슬픈 눈길을 마주하고 싶었다. 사당(祠堂)의 문은 굳게 잠겨있고 담장 안으로 보이는 사당(祠堂)은 적막(寂寞)했다. 고려(高麗) 왕조(王朝)의 마지막 신하(臣下)들이 신라(新羅)의 마지막 왕에게 제사(祭祀)를 지낸 마음은 무엇인가. 망해가는 왕조(王朝)를 보며 역시 신라(新羅)의 마지막을 정리(整理)한 경순왕(敬順王)의 회한(悔恨)을 역지사지(易地思之)로 헤아렸던 것은 아닐까? 사당(祠堂)에는 허망(虛妄)의 비애(悲哀)들이 늦여름의 햇살 아래 조용히 내려앉고 있다. 수퍼에서 내려와 이온수로 갈증(渴症)을 달래고 길을 나서지만 머릿 속이 복잡(複雜)하다.

 

허망(虛妄) : 어이없고 허망함, 거짓되고 망령됨

 


중간에 하룻밤을 지샐 민박(民泊)집이 없어서 해껏 안에 삼화실(三花室)까지 당도(當到)해야 한다. 평촌에서 몸을 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기운(氣運)은 방전(放電)된 상태지만 홀로 맞아야 할 긴 시간(時間)을 감당(堪當)할 수 없어 결국 삼화실(三花室)까지 가기로 했다.

 

징검다리는 점점점 말줄임표로 놓여있었다. 삶은 말이 아니라 느낌이라고 징검다리는 말하고 있다. 산그리메가 내려와 쉬어가는 샛강은 길은 왜 걷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여울이 이는 다릿돌 주변(周邊)엔 손가락만 한 피리들이 떼지어 다니고 저 멀리서 왜가리는 오지 않는 피리 떼를 기다린다. 징검다리 건너 강변(江邊)길이 다다를 화월마을에는 노인(老人)들이 서늘맞이를 즐기고 있다.

 

여울 : 강이나 바다의 바닥이 얕거나 좁아 물살이 거세게 흐르는 곳

그리메 : 그림자의 옛말

 

밤을 지새우다. 밤 새우다 =달서(達曙)하다=달야(達夜)하다. 밤을 새움

삼경(三更) : 하룻밤을 오경으로 나누고 그 셋째 부분 자시(子時)

 

해껏 : 해가 질 때까지

 

서늘맞이하다 : 여름의 무더위를 피하여 시원한 바람을 쐬다.

 

 

이 마을 당산(堂山)나무는 아름드리 벚나무다. 제철에 꽃피고 질 때면 마치 봄날의 눈처럼 고울 듯싶다. 삼화실(三花室)까지 오르막 포장도로(鋪裝道路)는 느긋한 마음이 아니면 쉽지 않은 길이다.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명사마을로 가는 길이 더욱 그렇다.

 

아름드리 : 둘레가 한 아름이 넘는 큰 나무 등(아름드리 나무)

 

프랑스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12,000km 실크로드를 오직 두 발로 걸었던 퇴직(退職) 언론인(言論人)이다. 그는 우리에게 중요(重要)한 것은 목표(目標)가 아니라 길이다라고 했다. 올리비에의 수준(水準)이야 못되더라도 걷는 자체(自體)에서 자신(子申)을 찾을 수 있다면 어려운 것은 어떠하며 쉬운 길은 또 어떠랴. 길이 험할수록 힘들수록 보고 느끼는 순간(瞬間)에 집중(集中)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발길은 가벼워지고 비로소 길을 걷는 즐거움을 몸이 받아들인다.

 

멀리 있는 삼화실(三花室)까지는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므로 잊기로 했다. 명호천에서는 어른들이 천렵(川獵)을 즐기고 녹슨 양철 대문(大門) 집의 할머니는 마당의 화덕에 불을 피우고 있다. 여름 휴가(休暇)를 내어 온 아들 내외(內外)에게 씨암탉이라도 안칠 모양이다. 명사마을을 지나서 길은 발아래로 다랭이논이 계단(階段)처럼 펼쳐진 하존티 마을을 굽어보며 상존티 마을로 들어선다. 길옆 비닐하우스엔 철 지난 취나물이 쑥대밭처럼 무성(茂盛)하고 오르막 대숲 길은 터널을 이뤄 어둠살이 내린다. 마지막 재빼기 존티재를 정점(頂點)으로 솔가리 가득 쌓인 내리막길이 시작(始作)된다.

 

아름드리 : 둘레가 한 아름이 넘는 큰 나무 등(아름드리 나무)

아름 : 두 팔을 둥글게 모아서 만든 둘레

재빼기 : 재의 맨 꼭대기=영마루 잿마루 영두(嶺頭)

 

천렵(川獵) : 냇물에서 놀이로 하는 고기잡이

다랭이논 : 경사(傾斜)진 비탈을 개간(開墾)하여 층층이 만든 계단(階段)식 논

 

어둠발 : 어두워지는 기세

어둠살 : 어두워지는 기미

 

존티재에는 익살맞은 형태(形態)의 부부(夫婦) 장승이 돌무더기 위에 나란히 서서 여행객(旅行客)을 맞는다. 입술에 연지(臙脂)를 바르고 혀를 내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의 표정(表情)이 짓궂다. 길섶의 때 이른 구절초가 까르르 웃는다.

 

존티재를 내려서면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듯 다시 밝은 빛을 만나고 해는 서산마루에 걸터앉아 갈 길 먼 여행객(旅行客)을 기다리고 있다. 손전등(電燈)을 켜지 않아도 될 성싶다. 대신 해가 뉘엿뉘엿 하자 산모기가 땀 냄새를 맡고 쉼없이 달려든다.

 

삼화실(三花室)이라는 이름의 유래(由來)는 여러 가지가 전해오는데 그중에서 세 가지 꽃이 피는 골짜기라는 뜻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정마을의 배꽃, 중서마을의 매화(梅花), 도장골의 도화(桃花)가 삼화(三花)이다. 봄날에 와야 제격일 성싶다.

 

길섶 : 길의 가장자리, 보통 풀이 나 있다.

글 정보
이전글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17
다음글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