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약관 보기
개인정보 보기

책 읽기(독서)

글 정보
제  목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17
등록일 2022.12.18 조회수 775

어둑해지는 기운(氣運)을 타고 삼화실 안내소 뒷산 하늘에 구름발이 불머리처럼 피어올랐다. 놀란 새들이 날갯짓을 재촉하며 숲으로 스며든다. 민박집에 도착(到着)하니 날은 저물고 방은 동이 났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 온종일 혼자 걸은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나와 둘이서 걸은 것 같기도 하다. 행복(幸福)한 것 같기도 하고 외로웠던 것 같기도 하다. 길은 내일도 그러하리라.

 

불머리 : 불의 위쪽 부분

구름발 : 길게 퍼지거나 뻗어있는 구름

 

138

아침부터 내린 비는 지짐거렸다. 작달비는 아니지만 금세 옷이 젖을 만큼 내렸다가는 이내 그치고 개었다가는 다시 보슬비로 내렸다. 비 맞는 앞산 머리가 운무(雲霧)로 그윽하다. 종일토록 흐린 날이 될 것이라는 징후(徵候).

 

지짐거리다. : 조금씩 내리는 비가 오다 말다 하다.

작달비 : 굵고 아주 거세게 내리는 비

보슬비 ; 바람이 없는 날 가늘고 성기게 조용히 내리는 비

 

생량(生涼) : 가을이 되어 서늘한 기운

 

술꾼들은 자기 안에 감춰진 슬픔을 불러내는 비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면서 더 큰 슬픔에 몸을 맡긴다. 모든 비는 똑같이 술비다. 길 가는데 어찌 맑은 날만 바라랴. 시월의 첫날 날은 흐리고 습도(濕度)는 높아 후덥지근하지만, 노랗게 물든 들녘의 나락은 실하게 익어가고 있다.

 

142

다리를 건너면 조그마한 동산 하나가 버디재 관문처럼 객을 맞는다. 모양새가 사발 가득 올려진 감투밥을 닮아 밥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밥이 권력(權力)이고 밥이 목숨줄이었던 시절 굶주린 배는 산도 밥처럼 보였으리라. 골퍼들의 귀가 솔깃해질 버디재는 예전에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由來)한다. 길가 대봉은 낮술에 취한 듯 볼그레 하고 밤송이 속의 아람은 누렁이 암소의 선한 눈망울을 닮았다.

 

목숨 : 살아가는 원동력, 숨을 쉬는 힘

목숨을 도모하다. : 죽을 지경에서 살 길을 찾다.

 

아람 : 밤이나 상수리 등이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진 것 상태

도모(圖謀) : 어떤 일을 이루려고 수단과 방법을 꾀함

감투밥 : 그릇 위까지 수북이 담은 밥

고깔밥 : 밑에는 다른 밥을 담고 그 위에 쌀밥을 수북이 담은 밥

뚜껑밥 : 겉으로만 많이 보이게 접시 따위를 깔고 그 위에 놓은 밥

 

 

 

꽃은 감꽃이 밤꽃보다 먼저 피는데 열매는 밤톨이 먼저 떨어진다. 피고 지는 가치(價値)가 인간사(人間事)와 같겠는가마는 자연(自然)도 때로는 공평(公平)을 외면(外面)하는가 싶다. 여름꽃이 진 길옆 도랑엔 물 봉선화(鳳仙花)가 흐드러지고 쑥부쟁이도 하얀 미소(微笑)로 반긴다. 버디재는 높지 않고 가파르지 않은데다 숲이 짙어 서늘하고 호젓하다. 뒹구는 날짐승의 깃털 하나를 주워 도가머리인 양 모자에 꽂는데 숲 저만큼서 휫바람 새가 웃는다.

 

자전거 바퀴살로 물레방아를 만들고 진돗개 형상(形象)의 나무 조각(彫刻)까지 세워 놓은 물레방아집은 웬만한 설치작품(設置作品) 이상(以上)이다. 박한수 할아버지가 만든 작품(作品)인데 할아버지는 여행객(旅行客)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도 식수(食水)를 받을 수 있도록 한데우물을 만들고 화장실(化粧室)을 밖으로 냈다.

 

도가머리 : 새의 머리에 길고 더부룩하게 난 털, 머리털이 부스스한 사람

한데우물 : 집 울타리 밖에 있는 우물

 

짧은 시()에서 먼 길을 돌아온 늘그막 인생(人生)의 관조(觀照)가 배어난다. 할아버지의 삶은 아둔한 길손에게 주는 또 하나의 깨달음이다.

 

길손 : 먼 길을 가는 나그네

아둔하다 : 슬기롭지 못하고 머리가 둔하다.

 

서당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맞은바라기의 남해 뒷산이 아득하다. 저수지(貯水池)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들이 모여 거울처럼 맑은 하늘을 비추고 왼쪽으로는 지나왔던 들녘에서 가을이 황금(黃金)빛으로 익어가고 있다. 산촌마을 회관(會館) 앞길에 서면 가야 할 치받이 길은 된비알로 일어서고 운무(雲霧)가 걸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산자락은 까마득하다. 능선(稜線) 마루를 넘는 길이다.

 

치받이길 : 비탈진 길에서 올라가는 방향(方向)으로 난 길

된비알 : 몹시 험한 비탈

* 전망(展望)은 없고 바람도 없는 숲길 된비알은 정말 싫다.

 

맞은바라기 : 앞으로 바로 보이는 곳 = 맞바라기

 

돌비알 : 깎아 세운 듯한 돌의 언덕

 

등줄기를 타고 내리던 뜨거운 땀줄기가 바짓가랑이를 타고 서늘하게 흐른다. 비와 땀이 혼재(混在)한다. 숲은 무겁고 적막(寂寞)하다. 깊은 숲에서는 여행자(旅行者)도 한 마리의 작은 숨탄것일 뿐이다. 그 숲이 여행자(旅行者)를 품는다. 숲은 작은 한숨 하나라도 외면(外面)하지 않고 말없이 받아들인다. 말 없는 위로(慰勞)가 좋다.

 

숨탄것 : 생명을 가진 동물의 통칭.

 

글 정보
이전글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18
다음글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