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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19
등록일 2022.12.18 조회수 803

박경리(朴景利, 1926~2008) 문학관(文學官)에 전시(展示)되었던 낡은 만년필과 닳아진 우리말 사전, 토지 친필(親筆) 원고(原稿) 등의 잔영(殘影)이 그림자처럼 뒤따른다. 길가의 코스모스가 행사장(行事場)에 동원(動員)된 군중(群衆)처럼 무심히 손을 흔든다. 길에는 설익은 채 떨어진 감들이 마지막 혼신(渾身)의 힘으로 붉게 타오르고 있다. 더러는 선홍빛 속살을 드러낸 채 부서진 몸으로 가을 햇살을 받고 있다. 땅에 떨어져서도 홍시(紅柹)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낙과(落果)의 열망(熱望)으로 가을이 깊어간다.

 

잔영 : 희미하게 남은 그림자나 모습

 

가풀막진 산길엔 간밤의 비로 단풍(丹楓))가 되지 못한 채 떨어진 푸른 잎들이 뒹굴고 늙은 서어나무는 군락(群落)을 이뤄 호위병(護衛兵)처럼 따른다. 서어나무의 굵은 뿌리는 맹수(猛獸)의 발톱처럼 대지(大地)를 파고들고 있다. 잠포록한 숲길은 희뿌연 경계(境界)를 넘듯이 어느 순간부터 운무(雲霧)는 확연(確然)히 짙어지고 나무들이 숨바꼭질하는 숲에서 길손은 서투른 술래가 된다.

 

길손 : 먼 길을 가는 나그네

가풀막 : 몹시 가파르고 비탈지다.

가풀막지다 : 가파르게 비탈져 있는 눈앞이 아찔하고 어지럽다

잠포록하다 : 날이 흐리고 바람기가 없다.

 

이방인(異邦人) 같은 낯선 바람이 소의 혓바닥처럼 목덜미를 핥고 지난다. 등 뒤에서 불어오는 재넘이 바람이 서늘하다. 산비탈에는 집채만 한 바위들이 다시 달릴 날을 기다리고 길섶의 조릿대는 허리까지 차오른다. 수종(樹種)이 바뀐 숲길은 너덜겅으로 이어졌다가 끊기고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反覆)하다가 계곡(溪谷) 하나 만나 동행(同行)한다. 숲 그늘 사이로 비추는 피자 조각만 한 햇볕이 반갑다. 아람 벌어진 으름은 누에 성충(成蟲) 같은 뽀얀 열매를 수줍게 내보이고 있다.

 

재넘이 : 밤에 산꼭대기에서 평지로 부는 바람 =산바람 = 산풍(山風)

아람 : 밤이나 상수리 등이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진 것이나 그 상태

길섶 : 길의 가장자리, 보통 풀이 나 있다.

너덜겅 : 돌이 많이 흩어져 있는 비탈

 

 

상강(霜降)을 하루 앞둔 시월 하순(下旬)은 더위의 끝자락을 차마 놓지 못하고 있었다. 숲은 절기(節氣)와 상관(相關)없이 이제야 신들메를 고쳐매고 있다. 길섶의 모과나무만이 노랗게 익은 열매를 단풍(丹楓))처럼 매달거나 땅에 떨궈 온몸으로 가을을 맞고 있다. 계절(季節)은 어느 순간(瞬間) 산하(山河)를 가을로 채우고 훌쩍 떠날 테지만 시간(時間)은 여름과 가을이 함께 하고 있다. 더 머무르고자 하는 여름의 미련(未練)을 외면(外面)하지 못하는 가을이 바보 같다. 길옆으로 흐르는 계곡(溪谷)은 깊고 마주하는 능선(稜線)은 부드럽지만 까마득하게 높다. 더구나 치받이로 일어서는 시멘트 포장도로(鋪裝道路)는 몸을 풀만한 겨를을 주지 않는다. 길을 가다 보면 삶이 그러하듯이 산()이 벽()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신들메 : 신이 벗어지지 않도록 신을 발에다 동여매는 끝

길섶 : 길의 가장자리, 보통 풀이 나 있다.

능선마루 : 능선의 마루

능선 : 산등성이를 따라 죽 이어진 선

겨를 : 어떤 일을 하다가 다른 일이나 생각으로 돌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餘裕)

 

산길이나 삶의 길이나 감당(堪當)할 수 없어 포기(抛棄)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감당(堪當)할 수 없어 포기(抛棄)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抛棄)하기에 감당(堪當)할 수 없는 것이리라. 말없이 서두르지 않고 가다 보면 하나 더 보고 하나 더 듣게 되는 담쟁이 발길도 나쁘진 않다. 저것은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느낄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저것은 절망(絶望)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나아간다.

 

나쁜 산길은 없다. 쉽거나 힘들 뿐이다. 힘든 길일수록 맥박(脈搏)은 요동(搖動)치고 힘든 일을 이겨낸 기억(記憶)은 풍요(豐饒)롭다. 담쟁이처럼 가는 길에 땅에 떨어진 모과 열매를 주어 가을 내음을 맡고 길섶의 들국화(菊花) 꽃잎에서 가을의 또 다른 체취(體臭)를 맡는다. ()은 아직 물들지 않았지만, 길손의 허파는 가을 향기(香氣)로 가득 찬다.

 

길손 : 먼 길을 가는 나그네

길섶 : 길의 가장자리, 보통 풀이 나 있다.

 

둘레길을 걸으면서 길손은 자연스레 숲이 주는 향기(香氣)에 취하는 버릇이 생겼다. 산초(山椒)나 잰피나무의 열매를 비벼 으깬 뒤 손에 배인 향기(香氣)를 맡는 일은 이제 길 가는 즐거움의 하나가 되었다. 봄날엔 생강(生薑)나무와 진달래의 꽃잎을 따서 혀끝에 올리고 여름철엔 찔레꽃과 칡꽃의 아찔한 향기(香氣)에 취()하곤 했다.

 

잰피 : 조피의 방언

조피 : 산초나무 열매

 

햇살의 차이인가? 봄꽃에는 배냇내 같은 비릿함이 섞이고 여름꽃엔 성숙(成熟)한 여인의 체취(體臭)가 난다. 꽃들은 저마다 자기 빛깔과 향기(香氣)로 지는데 나는 어떤 향기(香氣)로 꽃들의 가슴을 채울 수 있을까? 내 안의 향기(香氣)를 의심(疑心)하며 걷는 길에 보랏빛 꽃향유가 지천(至賤)으로 피어나고 있다.

 

배냇내 : 갓난아이의 몸에서 나는 냄새

꽃향유 : 꿀풀과의 여러해 살이 풀

지천(至賤) : 하도 많아서 별로 귀할 것이 없음

 

비리다. : 1.물고기의 생살이나 비늘, 육류의 피에서 나는 역한 냄새나 맛이 있다

2.날콩이나 채익지 않은 콩따위를 씹을 때 나는 풋풋하고 살짝 역겨운 냄새나 맛이 있다

3.고인물이나 젖따위에서 나는 비위에 살짝 거슬리는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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