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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20
등록일 2022.12.18 조회수 755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 가며 두어 시간 가까이 힘겹게 오르다 보면 시야(視野)가 트이면서 건너편의 지리산(智異山) 능선(稜線)이 내게 아는 체를 한다. 쉼터의 나무 의자(倚子)에 앉아 쑥떡과 올벼 쌀로 점심(點心)을 대신(代身)한 뒤 숲길로 들어서니 까마귀 울음이 빈산을 울린다. 길은 조릿대가 가슴팎까지 차오르고 숲은 상수리나무가 차지(借地)하고 있다. 상수리나무는 잎을 내려보내 조릿대를 키우고 대나무는 상수리나무의 경쟁자(競爭者)들을 쫓아내며 담합(談合)하여 생태계(生態界)를 지배(支配)하고 있다. 이어지는 내리막 숲길은 깊고 가파르다. 급한 내리받이 경사(傾斜)는 게걸음을 강요(强要)한다.

 

길과 나는 화해(和解)하지 못한 채 좌우(左右)로 토라져 갔다. 가파른 내리막길은 1시간쯤 지나 숨을 고른다. 첩첩산중(疊疊山中)답게 나무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이용하여 살림살이를 만들고 의자(倚子)와 식탁(食卓)도 만들었다. 주인장(主人丈) 내외(內外)의 수더분한 미소(微笑)도 나무를 닮았다.

 

능선마루 : 능선의 마루

능선 : 산등성이를 따라 죽 이어진 선

토라지다. : 마음에 들지 아니하고 뒤틀리어서 싹 돌아서다.

 

발숫물의 배려(配慮)는 생각지도 못한 유쾌(愉快)한 기습(奇襲)이다. 손사래를 치다가 주인장(主人丈)의 권유(勸誘)를 못 이겨 대야에 발을 담갔더니 서늘한 청량감(淸涼感)에 꼬물거리던 발가락들이 물장구를 치고 토라졌던 두 발이 웃으며 화해(和解)를 청한다.

 

적당히 뒤로 기울어진 나무 의자에 앉는 듯 눕는 듯 등을 기대면 황장산(黃腸山)의 자태(姿態)가 눈 앞에 펼쳐지고 처마 밑에 매달린 오색 루타(푸마)에는 영혼(靈魂)의 숨결처럼 한 줄기 바람이 쉬어간다.

 

청량(淸涼) : 맑고 서늘하다

발숫물 : 발을 씻는데 쓰는 물

권유(勸誘) : 어떤 일 따위를 하도록 권함

 


마치 극장(劇場)의 일등석(一等席)에 앉아 서정(抒情) 가득한 한 편의 영화(映畫)를 보는 듯하다. 오랜만에 보는 금줄에서 하늘 호수(湖水)의 처마에 매달렸던 룽타의 호흡(呼吸)을 떠올린다. 길옆 넓은 녹차(綠茶)밭에는 목화(木花)를 닮은 하얀 차꽃이 소담스레 얹혔다. 정금마을에는 터앝이나 남새밭에 배추나 무를 심듯 차나무를 기르고 주변(周邊)에는 야생(野生) 차나무가 잡목(雜木)처럼 자유롭게 자라고 있다. 1km 가량의 포장도로(鋪裝道路)는 원부춘 마을회관의 들머리처럼 곧추 일어선다. 황장산(黃腸山) 등 주변(周邊)의 높은 봉우리들도 길손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춘다. 강은 길고 골은 깊어 길손의 호흡(呼吸)도 심연(深淵)으로 가라앉는다. 긴 들숨으로 강을 들이마시고 날숨으로 산을 토해내는 여유(餘裕)는 고단한 여행길의 끝자락에 이른 자만이 누리는 기쁨이다. 산골의 햇살은 짧고 어둠은 빨리 온다. 추수(秋收)를 기다리는 들녘이 햇덧으로 푸르스름하다.

 

곧추 : 구부리거나 굽지 않고 곧게

길손 : 먼 길을 가는 나그네

소담스럽다 : 생김새가 탐스러운 데가 있다. 음식이 풍족하여 먹음직하다.

들머리 : 골목이나 마을 길에 들어가는 어귀

들머리 : 들의 한쪽 옆이나 한쪽 가장자리, 들어가는 첫머리

 

햇덧 : 날이 짧아지는 가을날, 해가 지는 짧은 동안

 

몸을 푸는 데는 막걸리 한 사발이면 충분(充分)하다. 오늘 하루도 기적(奇蹟) 같은 삶이다. 내 안에 꽃이 피고 꽃잎은 하늘하늘 하늘로 오른다. 화개(花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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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레 그렇듯이 터미널이나 역() 주변에는 허름하지만 근사한 식당(食堂)이 있기 마련이다. 숙소(宿所)와 인접(隣接)한 식당(食堂)에서 해장을 겸한 다슬기국으로 속을 달랜다. 해뜰참은 지났으나 동살이 잡힌 들녘은 푸르스름했다. 화개천(花開川)이 기지개를 켜는 이른 아침 농부(農夫)가 트랙터를 몰고 나와 나락을 수확(收穫)하고 있다. 뒤따르는 농부(農夫)의 아낙이 쓰러진 나락을 한 아름씩 묶어내고 늙은 아비는 볏단을 경운기(耕耘機)에 실으며 일손을 보태는 가을 들녘이다. 농부 일가족의 바지런한 호락질에서 일상화된 노동(勞動)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해뜰참 : 해가 돋을 무렵

동살 : 새벽에 동이 틀 때 비치는 햇살

호락질 : 남의 힘을 빌지 않고 가족 끼리 농사짓는 일

바지런하다 : 놀지 않고 꾸준히 일하다.

 

벚꽃이 만개(滿開)한 날에 화개십리(花開十里) 벚꽃길을 걸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사랑의 길또는 혼례(婚禮)의 길이라고도 불린다. 계절(季節)은 눈부시게 고왔던 꽃잎이 지고 잎마저 버려야 하는 시간, 십리(十里) 벚꽃길은 이제 사랑을 떠나보내는 중이다. 늙은 벚나무의 색바랜 잎이 꽃보라처럼 날리고 있다. 마을을 형성(形成)할 만큼 영화(榮華)롭던 사찰(寺刹)은 오간 데 없고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탑동산이 화개천(花開川)을 내려다보는 법하마을을 지키고 있다.

 

숲길엔 야생(野生) 녹차(綠茶)가 숲을 이루고 차나무는 소박한 꽃을 머리에 얹었다. 차꽃은 가난한 집안의 며느리가 이고 온 이바지를 닮았다. 숲길에 소슬바람이 스치고, 낙엽(落葉)은 나비처럼 난다. 길에서 마주하는 계절(季節)의 순환(循環)은 두려웠고 버려지지 않는 인간의 탐욕(貪慾)은 가여웠다.

 

소슬바람 : 가을에 부는 외롭고 쓸쓸하고 으스스한 바람

 

길목 초입(初入)의 나무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지나왔던 둘레길 구간(區間)들이 뒤죽박죽 스쳐 지난다. 시간(時間)과 풍경(風景)들이 엊그제 같은데 세어보니 많은 시간(時間)이 흘렀다. 꽃이 피었다가 지고, 꽃자리에 맺혔던 열매들도 떨어졌다. 피는 날이 있으면 지는 날도 있고 꽃이 져야 열매가 맺는다는 것을 눈에 담을 수 있었던 길이었다. 세상(世上)이라는 들녘에는 대통령(大統領) 하야(下野)를 요구(要求)하는 촛불이 들불로 타올랐고, 추락(墜落)한 권력(權力)은 촛불처럼 흔들렸다.

 

초입(初入) : 골목 등으로 들어가는 어귀, 어떤 일의 시초(始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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