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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21
등록일 2022.12.22 조회수 782

둑길은 논바닥보다 높아 바람이 더욱 차고 노고단(老姑壇)에서 내려오던 햇살도 바람에 날린다. 서시천(西施川) 갈대숲은 무성히 자라 물빛을 가리고 벚나무 가로수(街路樹)의 앙상한 가지 사이로 오가는 새들의 날갯짓은 분주(奔走)하다. 둑길이 끝나는 곳에 구만교 2개가 나란히 서시천(西施川)을 가로지르고 에둘러 오르는 숲길 벼랑에 세심정(洗心亭)이 놓여있다.

 

축생(畜生) : 사람이 키우는 온갖 짐승

에둘러 : 직접 말하지 않고 짐작하여 알아듣도록 둘러대는

벼랑 : 낭떠러지의 험하고 가파른 언덕

 

온천(溫泉)과 지하수(地下水) 개발(開發)로 수량(水量)이 줄어든 서시천 상류(上流)의 얕은 물과 선바위들이 세심정(洗心亭) 이름 값을 하느라 벅차다.

 

안타깝게도 온천을 막았던 솥뚜껑의 근원(根源)을 찾을 수는 없지만 산 하나 넘어 인근(隣近) 산동(山東)에서 온천수(溫泉水)가 솟는다. 온동의 전설이 산동에서 현실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나병환자(癩病患者)들을 외면했던 솥뚜껑의 전설은 매정하다.

 

지리산 둘레길은 오늘 하루 사라지고 죽어가는 목숨들에 대한 연민(憐愍)으로 가득했다. 내일의 길에서는 생명의 기쁨을 만났으면 좋겠다. 대통령(大統領)이 국가의 부끄러움인데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대통령 밑에서 권세(權勢)를 누렸던 권력자(權力者)들 가운데 부끄러움으로 사직(辭職)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음을 국민들이 부끄러워하는 2016년 대한민국이다.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망국(亡國)의 날에 죽은 선비가 하나 없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통탄(痛嘆)하며 자결(自決)했다.

 

목숨 : 살아가는 원동력, 숨을 쉬는 힘

목숨을 도모하다. : 죽을 지경에서 살 길을 찾다.

 

도모(圖謀) : 어떤 일을 이루려고 수단과 방법을 꾀함

 


아무래도 새해 첫날부터 정분(情分)이 났나 싶다. 지평선 같은 노고단 정상(頂上)과 뻗어내린 산맥(山脈)들이 울컥 반갑다. 반가운 것은 그리워한다는 것이리라. 누군가가 제 마음대로 무작정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오듯이 지리산(智異山)이 그랬다. 굳이 따지자면 길을 그리워했지 산을 그리워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리워한 적이 없는 산이 나를 대책없이 설레게 했다. 긴 기다림 끝에 꽃망울이 터지듯 둘레길의 발길을 떼기 시작한 지난해 4월부터 정분(情分)의 꽃망울이 조금씩 영글었나 보다.

 

예정(豫定)된 시간이 되자 버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출발(出發)했고 차창(車窓)의 화면(畫面)을 노고단 줄기가 채웠다. 구례(求禮) 들녘과 산 아랫마을들이 기억(記憶)이 없는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 그러하듯 노고단(老姑壇)에 눈이 멀었음이라. 길의 종점(終點)이 다다라서야 산을 사랑한다는 말의 한 귀퉁이를 겨우 깨달았다. 눈도 쌓이지 않은 메마른 겨울 산이 꽃병()을 앓는 봄 산 못지않게 마음을 흔들었다.

 


할머니는 길손의 나이를 묻더니 일흔다섯까지는 한창 좋을 때라고 했다. 좋은 시절이 얼마나 남았을까 싶어 얼른 마음속의 주판알을 튕겼다. 새해 첫날에 셈하는 더하기 1의 나이는 하얗게 변해가는 머리칼만큼이나 스산했고 부담(負擔)스러웠다. 젊어서 많이 다녀. 할머니의 말씀에서 젖은 바람 소리가 났다. 할머니 말씀을 뒤로하고 길을 가는데 일흔다섯이 자주 따라온다. 그 녀석의 눈에는 한창때로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철없음으로 인해 길손은 아직 한창때가 맞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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