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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23
등록일 2022.12.22 조회수 715

계척마을의 산수유 시목(始木)은 중국 산동성의 한 처녀가 구례로 시집오면서 묘목(苗木)을 가져다 심었다는 전설(傳說)과 함께 1000년의 세월(歲月)을 지켜오고 있다. 산동의 지명(地名)은 중국 산수유 주산지인 산동성에 닿고, 새댁이 심은 묘목(苗木)은 세월(歲月)이 흘러 풍년(豊年)을 비는 시목제(始木祭)를 올리면서 시작된다. 산수유 시목(始木)에는 즈믄해의 연륜(年輪)이 주는 너그러움과 위엄(威嚴)이 가득하다. 우리네 삶도 저와 같기를 바라며 마른 가지에 매달린 산수유 열매 하나를 입에 넣었다. 천년의 세월이 주는 경이(驚異)로움이 입안에 퍼진다.

 

즈믄 :

 

이른 봄날 세상(世上)이 노란 산수유 꽃으로 넘실대면 지리산 산골마을 사람들의 가슴에도 노란 꽃망울이 맺힌다. 설운 눈물이 해원(解冤)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산골마을이 꽃잎으로 덮인들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봄날의 산수유꽃이 그리운 또 다른 이유다.

 

해원(解冤) : 원통한 마음을 품

길손 : 먼 길을 가는 나그네

대수 : 중요한 일, 대단한 것, 최상의 일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 성곽(城廓)에서 방향(方向)을 틀어 밤재로 향하면 마을길이 산길로 바뀌고 산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가는 길에 만나는 수만 그루의 편백나무 숲은 울창(鬱蒼)하여 무겁고 그늘져 깊다. 향긋한 피톤치드를 맡으며 다리쉼 하기에 제격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길손이 선생님과 함께 고향 뒷산에 심은 나무들도 이처럼 안녕(安寧)하며 숲을 이루고 있을테다. 나무들은 푸르러 숲을 이뤘는데 나무를 심었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생각의 끝에서 만나는 편백나무 한 그루가 저마다 살갑다. 편백나무 숲을 내려서면 인접(隣接)한 계곡(溪谷)을 따라 오른다. 한겨울의 계곡물은 수정(水晶)처럼 맑고 작은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고드름이 되거나 빙벽(氷壁)으로 둘러섰다. 이어 터널을 이룬 대숲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산마루가 보이는 8부 능선쯤에서 길은 넓은 임도를 만난다.

 

밤재에 올라 되돌아서면 노고단(老姑壇) 능선이 기다랗게 펼쳐지고 건너편으로 겨울 햇살에 빛나는 남원(南原) 시가지(市街地)가 한눈에 들어온다. 밤재는 구례(求禮)와 남원(南原)을 가르는 고개로 서쪽은 견두산(犬頭山)이 인접하고 동쪽은 숙성치(宿星峙)로 이어진다. 한자로 율치(栗峙)라고 불릴 만큼 밤나무가 우거진 탓에 밤재라 불렸으나 지금은 밤나무 없는 밤재다. 밤재에서 내려선 응달진 길은 제법 자국눈이 쌓여 발등을 덮었다. 고라니는 어젯밤 이곳에서 자국눈을 밟고 숲으로 들어갔다는 알리바이 자귀를 숫눈에 남겼다.

 

능선마루 : 능선의 마루

능선 : 산등성이를 따라 죽 이어진 선

자국눈 : 겨우 발자국이 날 만큼 적게 내린 눈

길눈 : 한 길이 될 만큼 많이 쌓인 눈

자귀 : 짐승의 발자국

숫눈 : 눈온 후 아무도 지나지 않은 상태의 깨끗한 눈

: 섞이거나 더럽혀지지 않은

 

새롭게 시작된 숲길은 가파르기도 하지만 방전(放電)된 에너지로 인해 버겁다. 버거움은 비우고 내려놓으라는 숲길의 언어(言語). 어둡고 짚은 숲에서 자체(自體) 발광(發光)하듯 드러나는 커다란 개오동의 회색(灰色) 기둥은 마차 상아(象牙)처럼 밝고 매끄럽다. 봉황(鳳凰)이 깃든다는 벽오동(碧梧桐)도 이곳 개오동 앞에서는 울고 갈 성싶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산수유의 흐드러진 꽃이 용궁(龍宮)의 해초(海草)가 하늘거리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용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미처 용궁에 가보지 못했거나 용궁의 모습이 궁금하거들랑 용궁마을에 가볼 일이다. 용궁에서 열리는 산수유축제는 생각만으로도 유쾌(愉快)하다. 하지만 용궁 산수유축제에 토끼가 참석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으니 별주부는 지금도 지리산 어디쯤을 헤매고 있을 터다. 빈산에서는 숲이 꿈을 꾸고 빈 논에서는 농심(農心)이 꿈을 꾸듯 빈 길에서는 발길이 꿈을 꾼다.

 

점심때가 지나 출발(出發)했던 길이라 땅거미가 질 무렵 둘레길의 시작점이자 마침점인 주천면 외평(外坪)마을에 도착했다. 사위(四圍)는 금세 어둑발이 내렸다. 시외버스마저 끊긴 탓에 택시를 이용하여 구례 산동면사무소에 도착(到着)한 뒤 온천(溫泉)에서 어둠과 추위로 옹그렸던 몸을 풀었다.

 

어둑발 : 땅거미. 사물을 잘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빛살

옹그리다 :추위나 두려움으로 작게 움추리다.

 

인적없는 컴컴한 밤에 택시에서 내린 뒤 휴대폰의 손전등까지 켜가며 겪어야 했던 황당(荒唐)함이 금세 온천수에 녹아들면서 추억이 되어 간다.

 

황당하다 : 말이나 행동 따위가 참되지 않고 터무니 없다.

 

눈은 입춘(立春)이 지나고 사나흘쯤 뒤 폭설(暴雪)로 찾아왔다. 대설주의보(大雪注意報)가 내리고 눈 쌓인 차들이 눈 덮인 도로를 기었다. 전날 밤에도 눈은 가로등(街路燈) 불빛을 타고 내려왔다. 승용차 앞 유리창으로 달려와 자진(自盡)하는 진눈깨비 너머로 산들은 가까이에서 하얗게 빛났다. 산은 길눈에 쌓여 잠이 들고 숲길은 꿈으로 깊어갔다.

 

산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눈 내리는 숲길을 가고 싶었다. 설산(雪山)의 그리움이 신열(身熱)이 되었다. 아침 출발길의 배낭(背囊)에 방한(防寒) 자켓보다 더 두툼한 설렘이 담겼다. 하지만 하동의 봄은 절기(節氣)에 맞춰 서둘러 왔다. 지리산 길에 눈은 흔적(痕迹)조차 없고, 산은 이미 깨어 있었다. 눈 쌓은 숲길의 고요를 봄날의 꽃구경이 대신했다. 둘레길 초입(初入)의 매실나무밭에는 갓 핀 매화꽃이 해맑고 길가 기와집 뒤 안에서는 홍매화(紅梅花)가 떼지어 피었다. 섬진강(蟾津江)을 사이에 두고 겨울과 봄이 대치(對峙)하는 입춘(立春)의 절기(節氣)가 그저 경이(驚異)롭다.

 

길눈 : 한 길이 될 만큼 많이 쌓인 눈

초입(初入) :골목 등으로 들어가는 어귀, 어떤 일의 시초

대치(對峙) : 서로 맞서서 버팀

신열(身熱) : 병으로 말미암아 오는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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