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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24
등록일 2022.12.22 조회수 721

300년 수령(樹齡)의 서당마을 이팝나무의 씨를 받아 키운 묘목(苗木)이 서울로 가 청계천(淸溪川)의 가로수(街路樹)가 되었다. 청계천 이팝나무는 호랑이 출몰하던 선대(先代)의 땅과 그 땅을 지키며 서울로 간 후손(後孫)을 그리워하고 있는 늙은 나무를 기억(記憶)이나 하고 있는지.

 

일생(一生)을 추위에 떨어도 그 향()을 팔지 않는다는 매화(梅花)의 꽃말이 찬바람에 새롭다. 정월 대보름의 달을 보듯이 매화(梅花)를 본다. 키 큰 사철나무 한 그루가 표지목처럼 서 있는 둘레길 하동 안내센터는 언덕마을의 중턱에 있다. 안내센터에 들러 코스 안내와 교통편 등 몇 가지 사항을 확인한 뒤 출발(出發)한 길은 담벼락 높은 고샅길에서 시작됐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노래를 간직하고 있고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으며
달은 천 번 이지러져도 그 본래 모양은 남아 있고
버드나무는 백번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가르쳐 준 길을 머릿속으로 재현하며 발길을 뗐으나 몇 걸음 못 가 금세 길을 잃었다. 호둣속처럼 얽힌 실골목은 가다가 끊겨 막다른 골목에 닿거나 어느 집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마을 속 길은 휘어졌다 꺾어졌다 갈라지며 집과 집을 이어나갔다. 이웃한 집들의 마당에는 맑은 햇살이 빨래줄에 널렸다. 뒤돌아보는 길에 맞은바라기 교회 첨탑(尖塔) 너머로 하동공원의 누각(樓閣)이 아슴푸레하다. 명징(明澄)하여 조용한 시골 읍내의 시간이 아다지오 곡조로 흘렀다.

 

실골목 : 폭이 실처럼 좁고 긴 골목

맞은바라기 : 앞으로 바로 보이는 곳 = 맞바라기

명징(明澄) : 깨끗하고 맑은

아다지오 : 안단테와 라르고 사이의 느린 속도로 연주하는 곡이나 악장

 

둘레길을 가면서 어쩌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덤으로 주어지는 행운(幸運)이다. 인생은 정의(定義)할 수 없는 일이어서 정해진 길에서 얻는 가치(價値)보다 정할 수 없는 길에서 얻는 가치가 더 클 때가 있다. 어쩌다 만난 우연(偶然)이 인생의 가장 멋진 순간(瞬間)이 되듯 길 잃은 즐거움은 둘레길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둘레길에서는 정해진 길에 애면글면하지 않아도 좋아서 좋다.

 

애면글면 : 몹시 힘에 겨운 일을 하려고 애쓰는 모양

 

길은 길로 이어지고 차도(車道)인 뒤안길은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흘렀다. 공원(公園)에 오르면 하동읍(河東邑) 시가지(市街地)와 너뱅이들녘 너머로 아침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흐르는 섬진강(蟾津江)의 물줄기가 아스라하다. 오르막 숲길 어귀는 아름드리 도래솔이 사천왕문(四天王門)처럼 지켜선 채 하동읍(河東邑)을 내려다보고 있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도래솔의 갈라진 보굿 조각들이 어른 손바닥보다 굵고 크다.

 

아름드리 : 둘레가 한 아름이 넘는 큰 나무 등(아름드리 나무)

뒤안길 : 늘어서 있는 집들 뒤로 난 좁은 길,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고 다른 것에 가려져 있는 길

길섶 : 길의 가장자리, 보통 풀이 나 있다.

도래솔 : 무덤가에 죽 둘러선 소나무

보굿 : 굵능 나무줄기에 비늘 모양으로 덮여 있는 겉껍질, 두꺼운 나무껍질

 

숲길에 들어서면 과수원(果樹園)의 매실(梅實)나무 가지에 눈 쌓이듯 매화(梅花)꽃이 피어나고 길섶 양지(陽地)엔 노란 양지꽃이 꼬마전구처럼 불을 켰다. 겨울을 지나느라 푸른 멍이 든 개불알꽃도 무리 지어 해쪼이를 하고 있다. 요란한 강바람은 여전히 살을 에는데 봄은 소리 없이 다가와 꽃잎 하나씩 띄워내고 있다. 방학(放學)이 끝나고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숲속의 학교(學校)는 중세(中世) 수도원(修道院)처럼 고적(孤寂)하고 학교 옥상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을 지나는 흰 구름으로 인해 더욱 푸르다.

 

해쪼이 : 햇빛을 쬐어 자외선을 이용하는 일

고적(孤寂)하다 : 외롭고 쓸쓸하다. 인적이 없어 쓸쓸하고 고요하다.

 

늙어서 고적한것은 죽음보다 세 갑절 무겁다.

(늙은이가 외롭게 혼자 사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막막한 것은 없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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