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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25
등록일 2022.12.22 조회수 723

잎 말라 갈색(褐色)으로 변한 산의 좁은 숲길을 푸른 잎의 녹차(綠茶) 나무가 채우고 있다. 둘레길 들머리에서부터 따라온 섬진강(蟾津江)은 햇빛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받아 흘러간다. 아침 햇살에 생선(生鮮) 비늘처럼 빛나던 강은 이제 청옥(靑玉)의 하늘빛으로 물들었다. 강은 사람들이 잠든 지난 밤에도 별빛을 안고 흘렀을 것이다. 내가 새긴 발자국도 뒤돌아보니 강과 함께 흐른다. 지나온 길이 아름다운 이유다. 발걸음은 지나온 길을 만들며 앞으로 간다.

 

들머리 : 골목이나 마을 길에 들어가는 어귀

 

바람재에는 고개를 넘어오는 날파람이 고개의 이름을 대신한다. 바람 가득한 숲길에서 바람이 우는지 나무가 우는지 분간(分揀)할 수 없는 울음소리만 가쁘게 일어섰다 가라앉고 이어졌다 끊어진다. 온통 밤나무로 뒤덮인 적량 밤골은 율동마을이라고도 하는데 마을회관 뒷벽에는 마을 주민들이 직접 그린 둘레길 벽화(壁畫)가 원색(原色)의 화려(華麗)함으로 발길을 붙든다. 지난해 여름 길을 잘못 들어 땀깨나 흘렸던 기억이 새롭다.

 

날파람 : 빠르게 날아가는 결에 일어나는 바람/ 바람이 일 정로 날쌘 움직임

화려무비하다. : 화려함이 아주 뛰어나서 비길 데가 없다.

 

마을 앞 작은 저수지(貯水池)에는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와 함께 산 그리메가 담기고 우람한 플라타너스는 수호신(守護神)처럼 마을의 초입(初入)을 지키며 산골마을 풍경(風景)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된다. 길은 자로 잰 듯 경지(境地) 정리(整理)된 계단식 논이 끝없이 펼쳐진 적량 들판을 바라보며 관동마을로 휘돌아간다. 리버스 벽화는 검게 침식(浸蝕)된 옹벽(擁壁)의 표면을 쇠솔로 닦아내 명암(明暗)을 주는 방식으로 그린 그림이다. 논둑의 흙막이에 불과했던 옹벽(擁壁)이 캔버스로 변했다. 주민(住民)들의 긍지(矜持)인 태극기(太極旗)에 탄핵(彈劾)정국(政局)에서 극우(極右)의 상징(象徵)이 된 태극기가 오버랩됐다. 같은 태극기(太極旗)에서 함께할 수 없는 이미지가 상충(相衝)했다. 발길이 무거워지는 것은 길을 잃어서가 아니다. 밀림(密林)처럼 들어선 서어나무 군락지(群落地)와 서당마을을 지나면 덫을 놓아 호랑이를 잡았다는 함덧거리가 사라져간 생명(生命)에 대한 추모비(追慕碑)처럼 지명(地名)으로 남아 있다.

 

초입(初入) :골목 등으로 들어가는 어귀, 어떤 일의 시초

그리메 : 그림자의 옛말

 

마을회관이 손에 잡힐 때쯤 논둑에 선 나무 한 그루가 늙은 몸으로 길손을 맞는다. 이팝나무다.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 주린 배를 채우는 일이었던 시절에 사람들은 이팝나무의 꽃에서 하얀 쌀밥을 보았다. 꽃이 밥으로 보였던 애옥살이의 아픈 기억을 늙은 이팝나무에서 읽는다.

 

목숨 : 살아가는 원동력, 숨을 쉬는 힘

목숨을 도모하다. : 죽을 지경에서 살 길을 찾다.

 

도모(圖謀) : 어떤 일을 이루려고 수단과 방법을 꾀함

애옥살이 : 가난에 쪼들려서 애써서 사는 살림살이

 

봄마다 하얀 꽃으로 장관(壯觀)을 이루는 서울 청계천의 이팝나무 가로수는 여기 이팝나무 씨를 받아 키운 묘목(苗木)을 옮겨 심은 것이다. 청계천 이팝나무는 호랑이 출몰(出沒)하던 선대(先代)의 땅과 그 땅을 지키며 서울로 간 후손(後孫)을 그리워하고 있는 이 늙은 이팝나무를 기억(記憶)이나 하는지.

 

손끝에 머무는 바람은 여전히 시리고 살눈 내리는 날이야 며칠 더 있겠지만 봄은 회관 옆 길섶에도 파랗게 스며들고 있다. 파아란 개불알꽃 한 송이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겨울바람이 마을회관의 낡은 깃발에 걸려 휘모리로 울고 있다.

 

길섶 : 길의 가장자리, 보통 풀이 나 있다.

휘모리 : 가장 빠른 속도로 급하게 휘몰아 부르는 장단

 

미처 분광(分光)되지 못한 아침 햇살이 흑백(黑白)의 수묵화(水墨畫)로 세상(世上)을 그려내고 있다. 첩첩(疊疊)한 능선을 경계(境界)로 산은 다가설수록 확연(確然)하고 물러날수록 모호(模糊)한데 산안개는 다가선 마을에서 짙었다. 산은 페이드인 되는 연극(演劇) 무대(舞臺)처럼 모호(模糊)함에서 확연(確然)함으로 느리게 깨어나고 있다. 햇살이 프리즘을 통과(通過)할 때쯤이면 길손은 저 산 어디 숲길을 홀로 걷는 배역(配役)으로 무대(舞臺)에 오르게 될 것이다.

 

확연(確然)하다 : 넓게 텅 비어 있다.

모호(模糊)하다 : 말이나 태도가 흐리터분하여 분명하지 않다.

흐리터분하다 : 사물이나 현상이 똑똑하지 못하고 흐리다. 답답할 정도로 분명하지 못하다.

흐리멍덩하다 : 정신이 맑지 못하고 흐리다. 기억이 또렷하지 못하다, 귀에 들리는 것이 희미하다. = 흐리멍텅하다.

 

분광(分光) : 빛이 파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 현상

길섶 : 길의 가장자리, 보통 풀이 나 있다.

 

길섶 양지(陽地)에는 개불알꽃이 한창이고 매화나무는 폭죽(爆竹)처럼 꽃잎을 터뜨리며 축제(祝祭)를 벌이고 있다. 잠깐 돌아서 먼데 산 한번 보고 나면 진달래도 생강(生薑)나무도 금세 제 세상(世上)으로 피어나고 벚나무도 꽃 피어 술에 취한 건달(乾達)같이 산길을 갈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봄이 꽃으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얼음 풀린 계곡에서는 점보다 작은 피라미 새끼들의 아가미로 지리산 물이 처음 들어가고 먼 산에서는 초록(草綠)이 해일(海溢)처럼 일어서는데 발밑에서는 어린 쑥이 생글하다. 보굿 두터운 굴참나무도 귀를 갖다 대면 봄의 왈츠가 들려올 것만 같다.

 

 

능선마루 : 능선의 마루

능선 : 산등성이를 따라 죽 이어진 선

보굿 : 굵능 나무줄기에 비늘 모양으로 덮여 있는 겉껍질, 두꺼운 나무껍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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