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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걸으면 행복해지는 지리산(智異山) 둘레길 조영석 -26
등록일 2022.12.22 조회수 750

잎이 돋아나기 전에 꽃이 먼저 피는 진달래는 소소리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가지마다 꽃봉오리를 매달았다. 오르는 길이 힘들어 무심결에 진달래 꽃가지 하나 잡아당기다 얼른 놓았다 어떻게 견뎌온 세월인데 어떻게 맺은 꽃망울인데 싶었다. 힘든 길이야 쉬어가면 될 테지만 가지 꺾인 진달래의 춘삼월 꿈을 어찌하랴 싶었다.

 

소소리바람 : 이른 봄에 부는 차고 매서운 바람

소소리 : 높이 우뚝 솟은 모양

 

산길엔 필요한 곳마다 갈개가 군데군데 만들어졌다. 질퍽한 산길의 불편함을 아는 이의 수고로움이다. 누군가는 뒤에 올 사람을 위해 갈개를 만들고 누군가는 자신의 수월함을 위해 삼월의 꽃가지를 꺾는가. 갈개는 만들지 못하더라도 꽃가지를 꺾는 손은 되지 않도록 순간의 시간을 버텨준 꽃가지가 고맙다.

 

갈개 : 땅에 괸 물을 빠지게 하기 위해 얕게 판 작은 도랑/ 작은 등산 길 등에 있음

 

능선을 지나는 바람이 서늘타. 산 오른쪽 아래 키 작은 잡목 사이로 섬진강(蟾津江)이 숨바꼭질하듯 구불구불 흘러 화개(花開)로 간다. 가까이에서 반짝이던 강은 멀어질수록 희미해지다 마침내 하늘에 닿아 긴 흐름을 다한다. 강이 흐름을 끝내고 하늘과 하나 되는 곳에 화개동천(花開洞天)이다. 노고단에서 남쪽으로 내달리던 능선이 황장산(黃腸山)으로 솟은 뒤 섬진강(蟾津江)으로 스며든다. 둘레길은 이러한 능선과 봉우리를 넘나들며 간난(艱難)의 삶을 이어가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길이기도 하다. 산짐승처럼 목숨을 짊어지고 고개를 넘던 사람들도 목아재에 올라서서 맞은바라기의 능선과 산봉우리를 보며 쉬어갔을 테다. 사람은 가고 바람은 남는가. 시린 목숨들이 넘던 고갯길에 인적(人迹=人跡)은 없고 바람만 남아 길손을 맞는다. 멀리 발아래로 펼쳐진 마을들은 정면(正面)에 일직선(一直線)으로 놓이는데 바로 가지 못한 길은 굽이굽이 돌아가고 꺾어간다. 숲에서는 물오른 고로쇠나무들의 맑은 수액(水液)이 하얀 비닐봉투에 한 방울씩 흘러 담기고, 꺾어가는 길의 깊은 들숨엔 새싹들의 연초록(軟草綠) 배냇내가 섞인다.

 

시리다 : 괴롭고 힘들다.

목숨 : 살아가는 원동력, 숨을 쉬는 힘

목숨을 도모하다. : 죽을 지경에서 살 길을 찾다.

 

도모(圖謀) : 어떤 일을 이루려고 수단과 방법을 꾀함

 

맞은바라기 : 앞으로 바로 보이는 곳 = 맞바라기

능선마루 : 능선의 마루

능선 : 산등성이를 따라 죽 이어진 선

 

길손 : 먼 길을 가는 나그네

배냇내 : 갓난아이의 몸에서 나는 냄새

 

호중별천<壺中別天> - 최치원

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 (동국화개동 호중별유천)
동방 나라의 화개동은 항아리 속 별천지라네

仙人推玉枕 身世欻千年(선인추옥침 신세훌천년)
선인이 옥침을 밀어내니 이 몸과 세상(世上)이 문득 천년이라

春來花滿地 秋去葉飛天 (춘래화만지 추거엽비천)
봄이 오니 꽃이 땅에 가득하고 가을이 가니 낙엽이 하늘에 날리네

至道離文字 元來是目前(지도리문자 원래재목전)
지극한 도<>는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눈앞에 있었다네

擬說林泉興 何人識此機(의설림천흥 하인식차기)
자연에 흥취하고 있다고 말들 하지만 어느 누가 이 기미를 알겠는가

無心見月色 默默坐忘歸(무심견월색 묵묵좌망귀)
무심히 달빛을 쳐다보며 묵묵히 앉아서 돌아가는 것도 잊어버리네

密旨何勞舌 江澄月影通(밀지하노설 강징월영통)
은밀한 뜻 어찌 구구하게 말하리. 맑은 강물에 달그림자 드리웠네

長風生萬壑 赤葉秋山空(장풍생만학 적엽추산공)
흩날리는 바람은 수많은 골짜기에서 일어나니 붉은 잎 가을 산과 하늘이라네

 

가끔씩 응달진 언덕의 작은 빙벽(氷壁)이 햇빛에 날카롭게 빛나기도 하지만 봄날의 숲 사이로 오가는 새들의 날갯짓은 한결 여유롭다. 피아골에서 흘러 내려온 내서천이 둘레길을 지나 쉬엄쉬엄 섬진강(蟾津江)으로 가고 이용객 없는 천변(川邊) 부지(敷地)의 오토캠핑장은 한낮의 햇살만 소란(騷亂)하다.

 

천변(川邊) : 냇물의 가장자리, 냇가

부지(敷地) : 건물이나 도로에 쓰이는 땅

 

매실나무밭에서는 가지치기가 한창이다. 잘려 나간 애채는 수두꽃 같은 망울을 간직한 채 그늘 아래 누웠다. 어떤 가지는 누워서 꽃이 피었고 누운 가지 위로 산 가지의 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다. 연곡분교와 피아골 단풍(丹楓)공원은 남산교를 사이에 두고 공원 같은 분교와 학교 같은 공원이 적당히 작으면서도 적당히 떨어져 서로 간섭하지 않고 친밀하다. 브레이크를 밟고 내려오는 차량(車輛)들의 타이어 닳은 냄새가 가풀막진 도로에 짙게 깔린다.

 

애채 : 나무에 새로 돋은 가지

가풀막 : 몹시 가파르고 비탈지다.

가풀막지다 : 가파르게 비탈져 있는 눈앞이 아찔하고 어지럽다

 

당치마을 회관(會館)은 높다란 우듬지에 새 둥지처럼 산마루에 얹혔다. 지나던 구름이 쉬어가고 구름보다 가벼운 산골 마을 사람들도 쉬어간다. 보이는 산마다 발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까마득히 높은 산골 마을에 한 옥타브 높은 까마귀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우듬지 : 나무의 맨 꼭대기 줄기, 나무초리 포함

나무초리 : 나무줄기의 뾰족한 끝

 

산마루 : 산등성이의 가장 높은 부분

산등성이 : 산의 등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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